brunch

시리지만 포근한 날

by 오월

올해는 유난히도 더위가 길었다.

뭐가 그리도 급한지, 여름은 빨리 찾아왔고 물러나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었지만 올해만큼은 아직까지 여름용 셔츠가 정리되지 않고 있다.


여름이 좋아, 겨울이 좋아?

이 질문은 여름이 되면 반드시 누군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린 시절의 나는 겨울이 무척 싫었다. 가뜩이나 추운 도시. 바닷바람을 정면에서 마주하는 집에서의 겨울은 귀가 떨어져 나갈 듯이 아렸다.

눈을 좋아하지만 흰 눈 하나만을 바라보고 겨울을 좋아하기엔 내가 감내해야 할 단점들이 컸다. 신나게 놀다 보면 옷 밖으로 삐죽 나온 내복 소매도 싫었고 겹겹이 입어 움직임조차 불편한 겨울옷들이 싫었다. 한파가 자주 찾아와 보일러가 터지기라도 하면 물을 팔팔 끓여 낑낑대던 삶도 싫었다.

그냥 겨울이 찾아옴으로 집안의 빈곤함을 더 절실히 깨닫게 되는 환경이 싫었다.


이런 질문들은 초등학생 이후로 졸업한 줄 알았는데,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 오랜만에 익숙한 대화 소재가 등장했다.

"나는 겨울이 좋아."

"왜?"

"겨울 옷이 예쁘잖아. 예쁜 옷 입으면 기분도 좋고~"

물론 친구의 대답을 듣기 전까지도 나는 그래도 여름이 낫지... 생각하던 사람이다.

더위를 잘 타지도 않았을뿐더러 그 당시 우리 집에는 에어컨이 없었다. 선풍기 바람으로도 살 수는 있었기에 더위가 큰 걸림돌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습도가 높지 않아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겨울이 좋은 이유는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린 시절 나에게 깊게 박힌 겨울의 가난은 겨울을 더 알아가고자 하는 마음의 여유를 허락지 않았다.

그래서 친구의 대답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좋아한다는 이유는 너무 소박하고 귀여워서. 단순히 옷이 예쁘다는 이유로 겨울을 좋아할 수 있다고?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도 거창하지 않았다.

나는 여름이 가져다주는 특유의 여름방학 분위기가 좋았다.

느지막이 지는 해가 좋았고, 더위에 헥헥대지만 물놀이도 즐기고 친구와 함께 100원짜리 쮸쮸바를 사 먹는 일이 좋았다. 도저히 더위를 감당하기 힘들 때면 마당에 돗자리를 깔아 두고 가족들과 식사하는 분위기가 좋았고 내가 좋아하는 분홍색 민소매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친구가 겨울을 좋아하는 건 내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친구의 대답이 너무 와닿았을까, 아니면 습도가 높아진 여름 탓일까.

이제는 겨울이 그리 밉지 않다.

쇼핑몰에 벌써부터 등장한 겨울 아이템들을 보며 장바구니에 담아두고, 옷장 정리를 하며 꺼낸 겨울 옷들을 보며 지난겨울을 추억한다. 피부를 포근하게 감싸는 부드러운 텐셀 소재의 티셔츠를 내 피부처럼 입고 울이나 캐시미어가 함유된 가디건을 걸쳐 입는다. 온갖 무채색으로 뒤덮일 겨울 옷들 중 밝고 경쾌한 분위기를 내보려 색채감 있는 목도리를 살펴본다.

이제는 내게도 겨울이 밉지 않은 계절이 되었다. 있는 그대로의 계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겨울 그 자체를 받아들이게 된 건 친구의 대답도, 습도가 높아진 여름 탓도 아닐지도 모른다.

과거의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겨울의 기억과 온전히 이별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keyword
이전 16화산타가 된 어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