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그 내신으로 여상 갈거야?
공부를 그리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나는 중학교 1학년 시절, 조그마한 군산 소도시에서 광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한 학년에 2개 반밖에 없던 적은 학생 수. 과장을 보태자면 전 학년 전교생 모두의 얼굴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적은 인원이었다. 6년동안 한 학년 친구들은 다 한번쯤은 섞이게 되기 마련이라, 학년 전체 친구들을 알고 친하게 지냈다. 동네의 특성 때문인지 대체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형편의 아이들이 많았다.
교과목 관련 학원을 다니는 아이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많지 않은 전교생, 사교육 없이 공교육만으로도 상위권을 사수할 수 있었다.
중학교에 진학을 해서도 그리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당시 피아노 학원을 오래 다녔던 나는, 피아노 학원 선생님의 동생분께 부족한 수학 과외를 받았다. 그래서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로도 나름 괜찮은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광주에 온 이후로는 모든 게 달라졌다. 사교육을 받지 않는 아이들을 찾기 어려웠으며, 이사한 곳이 학구열이 심한 곳이었다는 것을 알게된 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존에 배웠던 학습진도와도 차이가 컸다. 시험은 뭔가 노력을 해도 중위권을 벗어날 수 없었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돈에 대한 열망이 알게 모르게 있었나보다.
이혼 전에도 엄마는 당시 혼자 일하며 60만원 번 돈으로 6인의 생활비를 충당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와 동생의 방과후 수업, 피아노 수업은 꾸역꾸역 유지했다. 아빠가 보내준 생활비는 30만원. 그마저도 보내지 않는 날이 많았다. 생활비가 똑 떨어질 때면 어디서 소식을 들었는지 부업거리를 얻어와 서툰 손으로 마른 새우를 한 포대씩 다듬었다. 새우가시는 따가웠고 엄마는 생활비도 보내지 않았던 아빠에게 쪽팔리게 부업거리를 뭐하러 얻어오냐는 핀잔을 들어가며 새우를 다듬었다. 집안 곳곳에 빨간 딱지가 붙었을 때도 엄마는 동네 할머니들의 "아이구, 젊은 애엄마가 불쌍해서...." 하는 걱정어린 시선을 피해 먼길을 돌아 집에 오는 날이 많아졌다. 이혼 후에는 홀로 아이 두 명을 키우기 위해 외할머니댁에 지내며 리조트 청소일을 했다.
살기 위한 엄마의 모든 행동들은 알게 모르게 나의 열등감이 되었다.
내가 지내왔던 모든 상황들은 돈, 돈, 돈, 돈 노래를 부르게 만들었다.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친구들과 함께 놀 때에도 나는 적은 용돈에 속으로 '비싼데 말고 저렴한 데...!' 외치기를 반복했다. 그때 친구들은 알았을까? 함께 놀러가자는 이야기가 나에게 얼마나 설레면서도 부담으로 다가왔는지.
고등학교를 진학할 시기. 상고와 일반고를 고민하는 시기가 왔다. 그래도 군산에서 꽤 괜찮은 성적을 유지했기에 내신이 생각보다는 좋았다.
어차피 일반고에 진학을 하더라도 사교육 하나 없이 공교육만으로 괜찮은 성적을 받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무엇보다 공순이가 되더라도 돈 걱정 없이, 내 노동력으로 얻은 돈을 만져보고 싶었다.
"너 여상 갈거야?"
"응"
"그 내신으로? 그럴거면 나랑 내신을 바꾸지.."
간혹 나보다 내신이 낮은 친구들이 왜 인문계를 가지 않고 여상을 가냐는 질문에 그저 머쓱한 웃음으로 때웠다. 나의 음습한 열등감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지금 성적으로 여상에 가서 상위권을 노리고, 차라리 좋은 직장에 들어가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는 그런 마음.
결론만 말하자면, 나의 열등감은 또다른 열등감을 낳았다.
돈을 좇았지만 나는 돈을 얻지 못했다. 오히려 새로운 열등감을 얻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