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사면 좋겠어요
약국을 다니면서 예상외의 곤욕이라고 한다면, 나의 직업명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다는 것이다.
종종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자리에서 흔히 직장 다닌다 설명하면 그냥 끝나면 좋으련만, 스몰토크와 무례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게 된다.
"혹시 어떤 일 하세요?"
"아, 저 약국에서 일하고 있어요"
"약국이요? 오, 약사님이세요?"
겠냐고.
나의 얕디 얕은 지식으로 소개해보자면 대부분 약사님들은 젊어도 20대 후반이 많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일반 대학 2년의 과정 이후, 약대를 가기 위한 시험을 치른다고 한다. 그 시험을 통과해야만 약학대를 편입학할 수 있었고 그 과정을 4년 동안 거쳐야 비로소 약사 시험을 응시할 자격이 갖춰진다. 물론 이러한 과정은 내가 20대 초반에 알게 된 정보이고, 현재는 바뀐 것으로 알고 있다.
아무래도 약국 하면 약사라는 직업을 생각할 수밖에 없긴 하다.
하지만 대학은커녕 최저임금을 간신히 맞춘 임금을 받으며 근무하는 나에게는 가벼운 스몰토크의 주제가, 마치 도축장에서 가축의 등급을 나누는 듯 한 평가를 받는 기분이었다.
너는 한우 투쁠, 나는 3등급.
"아, 아뇨 아뇨..! 저 그냥 약국에서 사무직으로 근무하고 있어요;;"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제 살 파먹기를 하고 있었다.
누가 묻지도 않았건만,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부터 약사들이 얼마나 대단한데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약사겠냐며 나를 깎아내리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의 나는 잘난 것도 없었으면서 왜 그리도 겸손을 떨었는지 모르겠다. 보편적인 선택들 틈에서 새로운 방향을 선택했다는 것만으로도 어쩌면 칭찬해 줄 만한 일이었는지도 모르는데.
나를 깎아내리는 소개로 스몰토크는 사망했다. 다들 별거 아니라는 듯 '아, 그래요?'하고 으쓱 넘어가기 바빴다. 상대방의 그러한 반응을 지독히도 살폈던 나는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긴 것을 후회하기보다, 이미 후회할 수도 없는 대학을 선택하지 않은 방향에 대해 수치심과 열등감을 느꼈다.
사실 상대방이 무슨 일을 하든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별 관심이 없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친구들과 직장 이야기를 할 때, 각자의 고충에 대해 토해내듯 열을 낼 때, 함께 이야기하는 순간에는 기억하지만 내 인생 하나 살아내기도 버거워서 타인의 직업까지 세세히 기억하지는 못했다. 내가 대학을 나오지 않은 입장이라 그럴 수도 있었지만, 상대방이 대학을 나왔는지, 어느 대학을 나왔는지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저 비슷한 고충을 가지고 비슷한 가치관을 나눌 수 있다면야 대화 상대의 조건은 딱히 문제 될 것이 없었다.
특정 직업이 보잘것없다고 해도 면전에 대놓고 무시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들이 입 밖으로 내지 않는 내밀한 생각까지는 내가 알 수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면전에는 상대를 무시하는 사람은 기본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못한 무례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혹여라도 그런 무례한 사람에게 무시당할까 두려워 미리 나를 깎아내렸다. 적어도 타인이 아닌 나 스스로 타박하면 덜 상처받지 않을까 싶어서.
하지만 오히려 내가 내 직업을 무시하며 나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알 수 없는 감정이 속에서 일렁였다. 불편한 감정이 구역감을 일으켰다. 나를 지키고자 했던 행동이 결국 나를 병들게 만드는 것이었음을 너무나 늦게 깨달았다. 이제는 스스로를 깎아내리면서까지 나를 소개하지 않는다.
누군가 직업을 물어보면 이렇게 답하곤 한다.
"나? 약팔이 경력 8년이야~ 내가 투약이랑 회계 빼고 다 하잖아"
대형약국에서 이 정도 경력이면 으스댈만하잖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