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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Feb 04. 2024

남들 하는 건 다 해볼걸

2024년 새해가 일주일쯤 지난 어느 날 갑자기 새해 일출이 보고싶어졌다. 나는 태어나 한번도 일출을 보기 위해 동해바다를 가본 적도, 새벽산을 오른적도, 심지어 일찍 일어난 적도 없었다. 오히려 그런 걸 하는 사람들을 보며 신기해하는 쪽이었다. 이 추위에, 저 인파 속에서, 마음만 먹으면 매일 볼 수 있는 해 뜨는 그 광경을, 굳이, 1월 1일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도통 이해가 안갔다. 같은 의미로 한 해의 마지막 날 보신각 종소리를 들으러 종각에 나가 매서운 겨울 바람에 빨개진 얼굴로 카운트다운을 하며 행복해하는 사람들을 보는 마음 역시 같았다. 그런 내가 갑자기 새해 일출이 보고 싶다고?


갑자기 하고 싶은 건 또 생겼다. 뜬금없이 비키니가 입고 싶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제법 살이 통통했는데 그 바람에 어린 시절에도 비키니 수영복을 입어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입학하기도 훨씬 전부터 여름이면 싸고 가까운 한강수영장을 가곤했지만 늘 엄마가 어디선가 얻어온 낡고 촌스러운 곤색의 원피스 수영복을 입었다. 알록달록 예쁜 수요영복을 입은 애들이 부러웠지만 굳이 티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것에 무덤덤한 척 하면서 동네 수영장에 비키니를 입는 여자들을 오바한다고 비아냥거렸다.

성인이 된 후에도 좀처럼 입을 기회가 없었다. 나는 내 몸매에 항상 자신이 없었고 어릴 때 관리를 안한 탓에 불어난 배와 어깨에는 튼 살이 얼룩덜룩 생겨버렸다. 결국 몸 자체가 콤플렉스 덩어리가 되었고 당연히 내 인생에 비키니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비키니라니, 나한테 지금 무슨 일이 생기고 있는건가? 마흔은 원래 이런건가?


생각해보니 이것 말고도 안해본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 중에는 진짜 별 것 아닌 것들도 많은데 예를 들면, 전주 한옥마을에서 한복을 입고 돌아다닌다거나 불꽃놀이 직관을 위해 한강에서 아침부터 죽치고 시간을 보낸다던가 하는 것, 좋아하는 평양냉면 전국 맛집 도장깨기를 해보는 그런 것들 말이다. 마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굳이 하지 않았던 것들.

혹은 좀 더 필사적인 것들도 있다. 밤을 새워 공부를 한다던가, 자격증 시험을 위해 몇달씩 준비를 한다던가, 바디프로필을 찍기 위해 운동과 다이어트를 죽어라 해본다던가 하는 것들.

또는 해보고 싶었지만 시작도 하지 않은 것들도 많았다. 베이킹과 커피를 배우고 싶다고 생각한 지 몇년이 지나도록 학원 등록 조차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남들은 어떡하든 더 많은 추억을 쌓고 더 많은 경험을 하려고 애를 쓰는데 나는 왜 세상 다 산 노인처럼 그런 것들에 심드렁했을까?

초연한 척, 관심없는 척 하는 것이 멋있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다. 한편으론 해보지 않은 것들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도 했다. ‘했는데 이상하면 어떡하지, 나한테 안어울리면 어떡하지, 남들이 비웃으면 어떡하지, 실패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어느 시점이 지나면서부턴 만사가 귀찮아졌다. 퇴근하고 집에오면 손가락하나 움직이기 싫어서 소파에 누워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시간을 낭비하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들을 관종이라고 욕했던 무수한 지난 날들을 후회했다. 왜 저렇게 악착같이 사냐고 비아냥댔던 내가 한심했다. 이쯤되니 내가 그들보다 삶에 대한 열정이 없었음을 인정해야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나는 한 번도, 그 무엇에도 뜨거워보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2,30대에는 시간이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술에 절어서 하루를 몽땅 날려도, 주말 내내 TV만 보며 게으름을 피워도 그렇게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날들이 하나도 애틋하지 않았다. 그땐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렇게 살아도 후회가 없을 줄 알았다. 40대가 되어 일출 한 번 못 본 것이 이렇게 후회될 줄 알았다면 남들 해보는 건 다 해볼 걸 그랬다. 침대에서 뒹굴뒹굴 할 시간에 운동화 끈 꽉 조이고 달리기라도 해볼 걸 그랬다.


다행이다, 내가 아직 마흔이라서. 지금부터 남들 하는 건 다 해볼거다. 일단 비키니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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