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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 Mar 17. 2024

이력서 쓰기 딱 좋은 나이, 마흔

근데 요즘 애들은 이력서를 노션으로 쓴다며?


잡코리아에 등록해둔 언제 수정했는지도 모를 내 이력서가 부끄러워지는 순간이다. 무슨 이력서까지 그렇게 유난스러워하냐고 따져묻고 싶다. 이력서라면 자고로 가독성있고 알기쉽게 적으면 되지 굳이 ‘노션’까지 만들어야 하는가. MZ는 그렇단다. 링크로 포폴을 만들어 넣고 배경 컬러도, 사진 한장도 허투루 넣지 않는다. 나를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지, 내 능력이 충분히 어필이 되는지 하나하나 계산해서 광고 카피 뽑듯 이력서를 만든다고 한다.


반면 내 이력서는 아직도 전통적인 취업 사이트 구석에 잠들어있다.  

내 최초의 이력서는 대학생 때 아르바이트를 구할 때였다. 편의점에서 파는 이력서 양식에 사진을 붙이고 정성스럽게 자기소개를 써내려갔다. 그걸 하얀 봉투에 고이 접어 넣어 사장님께 부끄럽게 내밀었다. 숨막히는 정적 속에서 사장님은 근엄한 표정으로 이력서를 내 눈앞에서 훑어내려갔다.

몇년 뒤 졸업할 무렵에는 당시 가장 큰 취업 포털이었던 사람인과 잡코리아에 이력서를 등록해두고 만만해보이는 회사에 찔러 넣기를 반복했다. 당시에도 소위 '먹히는 이력서'를 작성하는 방법 따위가 존재했지만 지금처럼 형식의 다양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이력서 업데이트는 참 귀찮은 작업이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다시는 쓰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다행히도 최근 몇 년 간은 업데이트할 일이 거의 없었다. 경력이 쌓일수록 알음알음 아는 사람 추천으로 이직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 기회 마저도 대리에서 과장 초반까지가 가장 활발하다. 결국 내 나이쯤이 되면 다들 한 회사에서 어느 정도 직급에 똬리를 틀고 앉아있다. 신변에 큰 변화가 있지 않는 한은 자리보존을 위한 '지키기 모드'로 살고 있는 것이다.


나이 마흔에 이력서 수정이라니!


회사를 옮길 때마다 다시는 이력서 쓸 일이 없기를, 이곳이 마지막 회사이기를 바랐다.  지금 이 회사를 처음 입사했을 때에도 그랬다. 이 정도면 탄탄하고 안정적인 회사라고 생각했기에 할 수만 있다면 이곳에서 퇴직을 하는 것도 괜찮을 듯 싶었다.  


늘 그렇지만 인생이 어디 마음먹은대로 되던가.  

최근 나이대가 비슷한 주변 동료들 사이에서 이력서 업데이트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능력있는 상사의 부당한 퇴사는 조직에 대한 회의감을 가지기에 충분했고, 이후에도 잦은 인사이동과 관리자급 직원들이 하루아침에 경질되는 상황을 바라보면서 나 역시 위기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또 그 상황이 내게 닥쳤을 때 느낄 무력감과 좌절감을 맛보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나도 이력서를 다시 펼칠 수밖에 없었다.


마흔이 원래 뒤숭숭해지는 나이인가봐.


이력서를 앞에 두고 앉으면 나도 모르게 위축된다.  

이 정도의 경력으로 괜찮을까? 회사 이름, 직급 다 떼고 시장에 던져졌을 때 내가 매력적인 인재인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다보면 마음이 뒤숭숭해진다. 어릴때는 어린 것만으로 무기가 되기도 했는데 이제는 완벽하게 실력 대 실력으로 붙어야 한다. 상대보다 뒤쳐지면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력서에 더 목을 매게 된다. 더 있어보이는 말이 없을까? 내 능력보다 더 뻥튀기해서 보여줄 순 없을까?

 

하지만 사실 이력서라는 게 들여다보면 별 거 없다. 각 직군별로 연차마다 거쳐야하는 업무가 있고, 그런 기본적인 플로우만 잘 따라왔으면 어디에 앉혀놓든 자기 밥값은 하게 마련이다. 우리가 면접관이었을 때를 생각하면 답은 간단해진다. 제 아무리 현란한 이력서가 들어와도 결국 본질은 무슨 일을 해봤는가, 그 일에 얼마나 기여했는가, 업무 범위는 어떻게 되는가, 어디까지 커버할 수 있는가를 보는 것이다.

포장지는 포장지일 뿐이다. 결국은 알맹이가 중요하다.


지금까지 잘 버텨왔다면 조금 뒤숭숭하더라도,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부딪쳐보면 별 거 아니었던 경험을 우리 다 해보지 않았던가. 그러니 나와 같은 보통의 마흔이들이 너무 기죽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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