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들이 이뤄놓은 찬란한 성과들”을 왜 나(우리)는 지금 여기서 운동으로 실현하지 못하고 있는가?
페미니즘은 ‘남성’으로 통칭되는 ‘중심’을 발견했고, 가부장제 이외의 여러 이름으로 이를 명명했고,
온갖 핍박과 고통, 서러움, 조롱에도 불구하고 그 중심을 끊임없이 상대화시켜 왔다.
그래서 수천 년을 지속해온 당연의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비로소 남성 중심성이라는 척도가 아닌 방식으로 세상을, 인간을, 관계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페미니즘은 나(우리)의 경험을 다시 해석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여성은 남반구 출신, 흑인, 유색인 여성, 레즈비언 여성, 매춘여성, 트랜스젠더 여성, 장애여성. 노인 여성..
열거하기도 쉽지 않게 여성으로 통칭하기 어렵다.
페미니즘은 이러한 여성 내 차이라는 중차대한 문제(과제)에 봉착했다.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이들은 ‘여성’이라는 범주를 문제화는 데까지 나아갔다.
더 나가 페미니즘은 ‘여성’이라는 범주 이 외에 (남성) 중심에 대한 부정으로서 규정된 범주가 무수히 확장되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흑인, 감정, 몸, 동물, 자연, 장애, 섹슈얼리티가 그것이다.
이러한 확장의 과정과 결과가 소위 발전이고 진보이며, 자본주의 체제와 가부장 체제라고 본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여성운동은 어느 순간 멈춘 듯하다. 다시 질문을 하면 페미니즘과 여성운동은 언제부터 갈라지면서 다른 길을 가게 된 것일까? ‘최초의 소수자’인 여성은 왜 자신의 경험을 올 곧이 문제화하지 못하고 있는가? 여성에게서 계급, 인종, 국적, 나이, 지역, 학력, 신체, 성적 지향, 젠더 지향 등의 범주들을 제하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위 범주들 각각에서 특권을 가진 여성이 남을까? 북반구 중상층의 백인 이성애자 기혼 성인 비장애.... 여성이 남는가? 한국의 ‘주류’ 여성운동은 이제까지 양성평등, 차별과 폭력철폐를 문제로 삼고 주로 주류화와 제도적 해결을 통해 성과를 만들어 왔다. 문제는 청계광장에 모인 여성단체들만 보더라도 그들이 함께 싸우는 여성들은 ‘순수한’ 여성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더 중요한 것은 여성이 이제는 유일한 소수자도 아니라는 점이다. 청소년, 이주자, 동성애자, 트랜스젠더, 노인, 장애인. 유색인. 매춘인.....
이제까지 운동으로 드러난 혹은 드러나고 있는 소수자들이다. 여성운동은 텅 빈 여성에 갇혀버린 건 아닌지.
보다 특별한 보다 순수한 여성(만)의 문제를 외치면서 현실의 여성문제를 볼 수 있는 체계적 인식과 운동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더 나아가 다른 소수자들의 고통을 함께 볼 수 있는 감수성을 키우지 못했다.
오랫동안 오직 이성애적 젠더만을 외쳐대다 그 자신이 또 하나의 중심 아닌 중심이 돼버린 형국이 아닌지.
[칼럼] 3.8에 대한 또 하나의 단상 - 보라와 동물권 中
http://blog.jinbo.net/glocalpoint/35
모든 여성을 위한 완전한 투표권을 확보하는 데는 한 세기 이상의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문제가 조금 복잡해진 것 같습니다.
페미니즘 여성 운동가인 세실 리처즈 (Cecile Richards)의 트위터 글이 인상적입니다.
(그녀의 트위터 아이디는 @CecileRichards입니다.)
Today and every day:
Trust women.
Listen to women.
Believe women.
테드에서 그녀는 여성의 정치적 진보와 다음 단계에 대한 강연을 합니다.
여성들은 지난 세기 동안 현저한 진전을 이루었습니다. 현상 유지에 도전하고, 오래된 금기를 없애고, 기업을 바꿔놓았습니다. 그러나 여성의 정치적인 대표성에 관해서는 아직 갈길이 멀다고, 운동가 세실 리차즈는 말합니다. 이 선구적인 연설에서, 리차즈는 여성 평등을 위한 세계적 정치 개혁을 요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방안을 제시합니다.
다시 한번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 준 강연이었습니다.
여성주의(女性主義, 영어: feminism 페미니즘) 또는 여권주의는 여성의 권리를 중요시 여기는 이론입니다.
학계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을 억압하는 젠더 불평등과 여성의 사회적 인식·지위를 기술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이 중 퀴어 이론의 분파에 속하는 이들은 젠더와 심지어 성(sex)마저도 사회적 환상이라고 주장하며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연구하여 사회관계를 이해하는 대안적 모델을 제시합니다.
몇몇 페미니즘 학자들은 모든 형태의 위계질서, 기업과 정부, 그리고 모든 형태의 단체에 존재하는 질서가 탈중앙화 되고 극단적인 민주주의 체제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다른 이들은 그 어떠한 조직이라도 집중화되어 있다면 이는 남성 중심적(androcentric) 가족 구조에 기반한 것이며 개혁하고 교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리하여 여성주의 학자들은 페미니즘의 본질을 성과 젠더에 국한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새로운 조류를 타고 페미니스트들은 다양한 배경에서 출현하였으며 페미니즘 이론가들은 젠더·섹슈얼리티와 타 사회 정체성들, 이를테면 인종이나 계급의 교차점에 집중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풀뿌리 민주주의 운동으로 나아갔고, 사회적 계급과 인종, 문화와 종교에 기반한 한계를 극복하는 것을 추구하였다. 이에 페미니즘은 문화적으로 지역화되었으며, 해당 사회의 여성에게 중요한 문제를 대하고(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여성 할례, 선발 자본주의 경제의 유리천장 현상), 특정 현상들(이를테면 강간, 근친상간, 모성)이 보편적인 이슈인지를 토론하였다. 이렇게 어렵게 어렵게 한걸음 한걸음 성장하고 있는 여성주의에 대해 그동안 편협한 시각으로만 바라본 게 사실이었습니다. 좀 더 넓은 차원에서 이해해야 될 일일 것 같습니다.
마르타 브린의 '시스터즈(만화로 보는 여성 투쟁의 역사)'가 쉽게 접근하게 해 주었습니다.
<시스터즈>는 종교, 국적, 교육 수준에 상관없이 세계 곳곳의 여성들이 사회의 불평등에 맞서 어떻게 연대하고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 왔는지를 보여 주는 훌륭한 그래픽 노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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