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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음뱅이 Jan 13. 2019

엄마를 보는 딸의 불행

비밀은 없다, 이경미, 2015

오랜만에 가족들이 서울에 올라왔다.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여동생이 이런 말을 꺼냈다. “딸은 엄마 팔자 닮는다 그러던데….” 엄마는 갑자기 얼굴을 굳히며 기분 나쁜 꿈을 꾼 사람처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빨리 취소 퉤퉤퉤 해라.” 순간 나와 동생은 빵 터졌지만, 기쁘진 않았다. 


말이 씨가 되어 딸이 자기처럼 사는 ‘불행한 일’이 생길까봐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이 안쓰럽고 미안했다. 동생은 어땠을까. 나도 엄마처럼 살게 되면 어떡하지, 이거나. 난 엄마처럼 안 살 거야, 이거나. 뭐가 됐든 동생은 엄마의 삶을 ‘나의 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미안함부터 앞섰던 나에겐 ‘나의 일’이 아니었던 거고. 

아빠에겐 ‘나의 일’이었을까? 에이 설마. 부엌이 익숙한 엄마와 엄마에 익숙한 아빠. 남자들은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여자들은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명절 풍경.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지금 와서 잘난 척 아빠의 태도를 훈계해보지만 나 역시 ‘그땐 아무것도 몰랐다’고 억울해하는 부역자일 뿐이다. 


하지만 동생은, 진작부터 궁금했을지 모른다. 가족의 평화가 깨질까봐 마음속에 감춰두고 혼자서 중얼거렸을지 모른다. 엄마는 뭘 보고 아빠랑 결혼했지? 엄마는 저 고생을 하면서 어떻게 아빠랑 살지? 아니, 엄마들은 왜 다 이렇게 살아야 하지? <비밀은 없다>는 연홍(손예진)과 민진(신지훈), 엄마와 딸의 이야기다. 

어느 날 갑자기 민진이 사라진다. 정신없이 딸을 찾던 연홍은 민진의 절친 미옥(김소희)을 만나 이런 얘길 듣는다. “엄마는 멍청하다고 했어요. 엄마는 멍청해서 지가 지켜줘야 한다고 했어요.” ‘바보 같다’도 아니고 멍청하다니.

‘엄마’와 ‘멍청하다’는 한 번도 연결 지어 본 적 없는 단어다. 불합리한 가족 제도 속에서 고생하는 엄마가 불쌍했던 적은 있지만. 효자건 불효자건, 아들은 대부분 엄마를 불쌍하게 여기고 미안해한다. 그들의 뒤늦은 효도는 가부장 문화의 불합리를 타파하는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희생자를 만듦으로써 이뤄진다. 이상적인 결혼상대를 논할 때 항상 언급되는, ‘엄마에게 잘 할 여자’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야 내가 딸의 마음을 100%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동생에게 물었다. 그날 얘기와 민진의 대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나는 나이 먹는 게 싫거든? 근데 그게 주름이 생겨서도 아니고 체력이 떨어져서도 아니야. 다들 말하는 ‘결혼할 나이’가 되는 것 같아서 그게 싫다. 

결혼해서 밖에 나가 살면 엄마 편이 필요할 때 아무도 없잖아. 나는 그게 너무 무섭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동생은 한 마디 더 덧붙였다. “그리고 오빠야는 결혼하더라도 아빠처럼 안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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