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볼, 베넷 밀러, 2011
좋은 걸 나누고 싶은 마음에 의도치 않게 호들갑을 떨게 될 때가 있다. “꼭 가봐, 올해 먹었던 것 중에 거기가 제일 맛있었어!” 한껏 들떠 곧바로 식당 위치를 검색하는 친구를 보면, 갑자기 불안해진다. 기대를 너무 많이 하면 뭘 먹어도 실망할 텐데. 아차 싶어 뒤늦게 ‘밑밥’을 깐다. “근데 사실 쌀국수가 맛있어봤자 쌀국수이긴 하지….”
친구 입장에선 보라는(먹으라는) 건지, 말라는 건지 헷갈리겠지만 내 마음은 한결 편하다.
누군가의 기대를 받는다는 건 분명 부담스러운 일이다. 스스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호들갑은 무슨, 나에 대한 기대치를 높일 만한 말은 아예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대신 꾸준히 밑밥을 깐다. “난 안 될 거야, 아마.” “이번 생은 틀렸어.” 섣불리 기대하고, ‘실망했다’며 차갑게 돌아서는 사람들에게 상처받지 않기 위해. 자존감을 망가뜨리는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근거 없는 자신감’ 대신 ‘근거 없는 자기 비하’가 차라리 유용하다. “거 봐, 난 안 될 거랬잖아.”
<머니볼>의 빌리(브래드 피트)에게도 상처가 있다. 큰 기대를 받으며 야구선수로 데뷔했지만 선수 생활 내내 부담을 떨치지 못해 결국 이른 나이에 유니폼을 벗었다. 은퇴 후 만년 꼴찌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단장이 되어 팀을 성공적으로 이끌지만, 플레이오프에서 또다시 패배의 쓴맛을 보게 된 빌리. 기대를 받았던 만큼, 승리를 꿈꿨던 만큼 패배는 더욱 아프다.
그런 빌리에게 피터(조나 힐)는 경기 녹화 비디오의 한 장면을 보여준다. 거구의 타자가 타석에 들어선다. 평소 안타를 친 뒤에도 천천히 달리던 타자다. 어차피 2루까지는 못 갈 테니까. 그런데 오늘은 안 하던 짓을 한다. 깊숙한 타구를 날린 뒤 2루까지 가야겠다는 마음에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1루를 돌아 2루로 향하던 그는 ‘역시 안 되겠다’ 싶어 다급히 돌아온다. 응? 그런데 관중들의 반응이 이상하다. 1루로 슬라이딩하는 그를 보며 웃음을 터뜨린다. 상대 팀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왜지? 그가 친 공이 쭉쭉 뻗어나가 담장을 넘어갔기 때문이다. 홈런임을 깨달은 그는 그제야 멋쩍게 일어나 그라운드를 돈다.
나는 그동안 2루에서 아웃될까 두려워 1루에 만족하는 삶을 살았다. 2루타, 3루타, 심지어 홈런을 쳤음에도 원래 내 자리인 것처럼 1루에만 머물렀다. 덕분에 크게 실망할 일은 없었지만, 관중들이 박수 쳐줄 일도 없었던 것 같다. 이젠 내 배트와, 내 다리와, 내 운을 믿고 다음 베이스를 노려봐도 될 것 같다. 때론 뻥카가 현실이 되기도 하니까.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라는 <매트릭스 2>의 뻔뻔한 포스터 문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