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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르키 Dec 03. 2021

만 년 만에 만나서 반가운 두 거북이

나의 결혼 이야기 

우리는 회사 동료로 만나 6년 연애 끝에 지난해 결혼했다. 첫 출근한 겨울날 사무실에서 처음 규니를 보았다. 그는 오래되어 보이는 파란색 점퍼를 입고선 취업의 기쁨을 숨기지 못해 활짝 웃고 있었다. 회사 동기들은 장난 삼아 그 옷을 ‘거짓말 잠바’라고 불렀다. 아무리 봐도 옷이 크기만 크지 솜털은 적어보였다. 심지어 허리 위까지만 오는 반 외투였다. 그래서 규니의 동그란 볼과 코는 추위로 자주 빨개져있었다. 왜 이렇게 추운 옷을 입었어? 나중에 내가 물었을 때 그는 고향에 계신 아버지가 사준 외투라고 말했다. 


나의 친구이자 남편인 규니는 동해 바다가 보이는 마을에서 자랐다. 규니는 자기 고향을 촌이라고 불렀고 자기는 ‘촌사람’이라고 했다. “촌놈이 좋아. 나는 촌놈이야.” 그렇게 웃으면서 말할 때 생기는 볼우물과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눈웃음. 당시엔 깨닫지 못했지만, 나는 규니의 모든 것이 처음부터 좋았던 것 같다.


결혼을 앞두고 처음 규니의 고향에 가봤다. 그가 어릴 적 다녔던 학교들이 보고 싶었다. 고향집에서 5분 거리의 해수욕장으로 걸어가는 길, 그가 졸업한 초등학교와 중학교가 보였다. 그는 학교 앞 공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에서 친구들이랑 농구하고 놀았어.” 중학교 1학년까지는 또래 중에서도 가장 키가 컸었다고 했다. 하지만 점차 친구들의 키도 커졌다. 규니의 농구 포지션도 센터에서 수비로 바뀌어버렸다. 


그래도 그에겐 놀거리가 많았다. 축구와 음악도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는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밖에서 놀다가 집에 들어가는 해 질 녘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해가 저물 무렵이면, 노을을 바라보는 규니의 눈동자도 붉게 물들었을 터였다. 규니는 고요한 놀이터를 바라보면 기분이 이상했다고 말했다. 어릴 적 놀이터에서 느꼈던 감정을 딱 맞게 설명할 언어가 당시엔 없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개운함과 외로움이었던 것 같다고 했다. 맑은  날 저녁 어스름이 깔릴 무렵에 우리는 이런 얘기들을 나눴다. 나는 붉은 노을을 보면서 “대박!”이라고 말하지 않는 그와 더욱더 오래 대화하고 싶었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나이 든 국어 선생님이 들려준 얘기가 있었다. 

“너희들 사람으로 태어나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니? 눈이 먼 거북이가 거대한 태평양을 헤엄치다가 백 년에 딱 한 번 수면으로 올라오는데, 마침 바다를 둥둥 떠다니던 작은 널빤지가 있었던 거야. 그때 거북이 머리가 쏙, 널빤지 구멍 위로 올라오는 거지. 인간으로 태어나는 게 이렇게 힘들어. 너흰 그 희귀한 확률로 태어났어.” 


요즘은 가끔씩 이런 상상을 해본다. 먼 옛날, 같은 해에 태어난 눈먼 거북이 2마리가 태평양을 둥실둥실 헤엄치고 있었다. 둘은 각자의 바다에서 자유롭게 놀다가 백 년에 한 번씩 수면으로 머리를 쏙 내밀었다. 하지만 태평양은 넓고 넓어서 고개를 내밀어도 주변은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일 뿐이었다. 이백 년, 삼백 년, 천 년, 만 년…. 그렇게 백 년에 한 번씩 얼굴을 내밀기를 백 번 되풀이했다. 그러다 거북이 1은 바로 옆에서 자기처럼 바다 밖으로 솟아오른 거북이 2를 발견했다. 거북이 2는 거북이 1을 향해 활짝 웃으며 느릿느릿 말했다. “반가워어. 나 말고 다른 거북이를 본 건 만 년 만이야아아.” 거북이 1은 거북이 2의 선량한 생김새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거북이 2에게 물었다.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다음에 우리가 인간으로 태어나면 너를 어떻게 발견해?” 그러자 거북이 2가 천천히 대답했다. “걱정 마아아. 내가 그쪽으로 갈게에에.” 


스물일곱 살에 규니는 나에게 왔다. 빠르지 않고 서두르지도 않고, 그의 속도대로 느릿하고 진중하게. 그가 고향에서 맡고 자란 바다 냄새, 갖고 놀던 바람 빠진 축구공, 뛰놀던 놀이터, 좋아했던 가수의 앨범 CD들. 그가 사랑했던 것들이 모두 함께 내게로 왔다. 우연인 듯도 하고, 아니면 만 년 전에 태평양 망망대해에서 이미 예정된 일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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