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르키 Apr 19. 2023

울다가 드러나는 진실

집주인과 다투다가(...) 알아챈, 나도 몰랐던 내 마음 

금요일 밤부터 나는 남편과 냉전을 벌였다. 원인은 언제나처럼 청소와 분리수거였다. 베란다는 창고가 되어버렸다. 분리수거해야 할 종이와 플라스틱 용기가 그득했다. 토요일 아침, 세면대 옆엔 다 쓴 휴지심이 이틀째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남편이 듣기 싫어할 말이 내 머릿속에 떠돌았다. '더는 안 돼. 내가 손 쓰지 않으면 집안의 쓰레기는 모두 그 자리 그대로일 거야. 그냥 오늘 분리수거 내가 다 해버리자, 빨래 돌아가는 1시간이면 충분해.' 


베란다에 쌓인 종이와 플라스틱을 꺼내 하나씩 정리했다. 주말에 단잠 자던 남편은 내가 아침부터 부스럭부스럭 청소하는 소리를 내자 마음이 불편해진 모양이었다. 보통 내가 이러면 남편은 덜 깬 얼굴로 일어나 함께 청소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안방에 들어가니 남편은 어떤 소음도 안 듣겠다는 듯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 남편 없을 때만 몰래 청소하고 밥 짓는 우렁각시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남편에겐 내가 빌런인데, 설상가상 우리에겐 '공동의 빌런'도 하나 더 있다. 우리 집 바로 아래층에 사는 괴팍한 화쟁이 집주인 아저씨다. 40대인데도 늘 인상파여서 그다지 젊어 보이진 않다. 얇은 테 안경을 쓰고선 성마르고 조급한 목소리로 화내는 모습만 몇 번 봤다. 분리수거가 제대로 안 돼 있으면 세입자들에게 단체 문자를 보낸다. "분리수거도 제대로 안 하는 이런 짐승만도 못 한 사람은 도대체 누굽니까? 어쩌고저쩌고..." 


이렇게 욕할 거면 분리수거함이라도 놓을 것이지, 주차공간이 부족하단 이유로 끝끝내 설치하지 않았다. 게다가 자기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우리 남편에게 전화해 10분씩 소리를 지른다. 집이 낙후해 싱크대 배관에 문제가 생긴 적이 있었다. 집주인에게 고쳐달라고 했더니 수리비를 반반 부담하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집 어딘가가 삐걱거려도 군말 않고 살았다. 


하지만 집주인을 마냥 나쁜 사람이라고 규정할 순 없었다. 4년 전 계약할 땐 남편 얼굴을 보더니 보증금을 조금 깎아줬다. 2년 전 재계약할 때도 보증금을 한 푼도 올리지 않았다. 임대차보호법 덕분이긴 했지만, 보증금을 5%라도 올리려면 올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우린 시세보다 저렴하게 살면서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아침에 열심히 정리한 분리수거물을 집 앞에 내놓았다. 그런데 30분 뒤 집주인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 분리수거를 이렇게 하면 어떡해요? 내가 그렇게 말했잖아요? &#@%" 1층에서 집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남편은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나는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 직접 1층으로 내려갔다. 


집주인은 휴대전화에 대고 잔뜩 격앙된 목소리로 뭐라 뭐라 쏘아붙이고 있었다. 휴대전화 너머의 상대는 남편이었다. 내가 말했다. "사장님, 저한테 말씀하세요. 분리수거 제가 했어요." 그랬더니 집주인이 소리 지르면서 말했다. "제가 남편한테 투명봉투에 담아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어요 그런데 왜 종이백에 담아 내놓았냐고요?" 나는 알겠다고, 지금 바로 투명봉투에 다시 넣겠다고 답했다. 그런데도 집주인은 계속 소리를 질렀다. 우리 분리수거물 옆에는 몇 주 째 피자와 치킨 상자, 플라스틱 통이 나뒹굴고 있었다.


나도 화가 나서 대꾸했다. "우리처럼 분리수거 열심히 하는 사람이 여기에 어디 있어요? 피자 상자랑 플라스틱을 바닥에 던져 놓은 다른 사람들한테 뭐라고 하세요. 차라리 분리수거함을 만들어 주세요." 집주인은 분리수거함 놓을 자리는 없다면서, 날더러 분리수거함이 있는 집으로 어서 이사 가라고 소리 질렀다. 이렇게 면전에서 악 쓰는 사람은 내 인생에선 사회 초년생 때 만난 직장 상사 말고는 두 번째였다. 


이제 곧 이사인데 어째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남편이 일층으로 내려와서 내 어깨를 잡고 집에 가 있으라고 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집으로 올라갔다. 뱃속의 아기에게 미안해 눈물이 나왔다. 임신 기간 내내 나는 줄곧 행복했고 편안했다. 그런데 이런 고성을 듣게 하다니. 게다가 나도 큰소리를 내버리다니. 나는 집으로 돌아와 방에 앉아 배를 쓰다듬으며 "미안해 우리 아기야"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열어놓은 창문 밖에서 집주인이 다시 한번 악 쓰는 소리가 들려왔다. 


3, 4분 앉아있다가 참을 수 없는 심정이 됐다. 나는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남편은 가만히 서서 집주인의 쏟아지는 얘기를 듣고 있었다. 나를 보던 남편이 "올라가라니까!"라고 말했다. 하지만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나도 세입자의 덕목(?)을 잊어버리고 울면서 소리 질렀다. "우리 남편한테 소리 지르지 말아요!!" 잠시 대화가 멈췄다. 남편은 내 뒤통수를 쓰다듬더니 나를 다시 올려 보냈다.


얼마 뒤에 남편이 집으로 올라왔다. 잘 해결됐는지, 남편의 얼굴은 말끔하고 개운해 보였다. 집주인이 자기 집에서 투명 봉투를 많이 가져와 남편에게 줬고, 남편과 같이 분리수거를 정리했다는 얘기였다. "고맙네, 그나저나 너는 마음도 참 좋다."라고 말했더니 남편이 그랬다. "나는 집주인 아저씨한테는 화가 별로 안 나. 안쓰럽잖아. 물론 임신한 사람한테 그러는 건 정말 잘못이지. 하지만 아저씨를 이겨서 뭐 할 거야. 져주는 게 이기는 거야. 아저씨에겐 너도 없고 아기도 없잖아. 안쓰러워하는 것을 알면 오히려 상대방은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생각해 보면 과거에 집주인은 그렇게 성을 내놓고는 머쓱해하며 미안해한 적이 있었다. 왠지 나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산모에게 소리 지르는 것은 분명 지질한 행동이지만, 어느 누가 산모에게 화내는 사람이 되고 싶겠는가. 집주인 아저씨도 지금쯤 후회하고 있을 것 같았다.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이왕 내려올 거면 의연하게 내려오지. 우리 남편한테 소리 지르지 말라면서 울면 어떡해.ㅋㅋ" 그럴 때 나는 어떻게 해야 의연한 지 모르겠다. 남편 한 명이라도 의연해서 다행이다. 어떻게 의연해질 수 있는지 물어보자 남편이 대답했다. "하지만 네가 의연했더라면 눈물까지 나진 않았을 거야. 그 장면을 내 평생 오래오래 기억할 거야." 


울다 보면 나도 미처 생각 못했던 진실이 튀어나오는 것 같다. 아저씨의 부당함에 화가 난 줄 알았는데, 사실은 우리 남편에게 소리 지르는 아저씨한테 화가 났던 것이다. 나도 몰랐는데, 누구든 남편을 괴롭게 하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구나. (사실 남편을 가장 괴롭히는 사람은 나겠지만...) 


연애 때는 서로 좋은 것만 보여주려고 애쓰는데, 결혼하면 궁상맞은 상황도 맞닥뜨리게 된다. 신기하게도 좋은 것만 함께 경험하려 했던 연애 시절보다는, 지금이 오히려 더 애틋하고 사랑이 깊어진다. 앞으로도 더 그러겠지? 그래서 아침의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듯 끝났고, 우리는 순식간에 화해하고 초밥을 먹으러 갔다.

이전 07화 결혼식 이후, 싫어했던 가을을 좋아하게 되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