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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지지고 볶으며 깨달은 것들

이게 사랑이구나

by 노르키

금요일 밤부터 나는 남편과 냉전을 벌였다. 원인은 청소와 분리수거였다. 베란다는 창고가 되어버렸다. 분리수거해야 할 종이와 플라스틱 용기가 그득했다. 토요일 아침, 세면대 옆엔 다 쓴 휴지심이 이틀째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남편이 듣기 싫어할 말이 내 머릿속에 떠돌았다. '더는 안 돼. 내가 손 쓰지 않으면 집안의 쓰레기는 모두 그 자리 그대로일 거야. 그냥 오늘 분리수거 내가 다 해버리자, 빨래 돌아가는 1시간이면 충분해.'


베란다에 쌓인 종이와 플라스틱을 꺼내 하나씩 정리했다. 주말에 단잠 자던 남편은 내가 아침부터 부스럭부스럭 청소하는 소리를 내자 마음이 불편해진 모양이었다. 보통 내가 이러면 남편은 덜 깬 얼굴로 일어나 함께 청소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날은 달랐다. 안방에 들어가니 남편은 어떤 소음도 안 듣겠다는 듯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의 마음의 평화를 위해, 남편 없을 때만 몰래 청소하고 밥 짓는 우렁각시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남편에겐 내가 빌런인데, 우리에겐 '공동의 빌런'도 하나 더 있다. 우리 집 바로 아래층에 사는 괴팍한 화쟁이 집주인아저씨다. 40대인데도 늘 인상파여서 그다지 젊어 보이진 않다. 얇은 테 안경을 쓰고선 성마르고 조급한 목소리로 화내는 모습만 몇 번 봤다. 분리수거가 제대로 안 돼 있으면 세입자들에게 단체 문자를 보낸다. "분리수거도 제대로 안 하는 이런 짐승만도 못 한 사람은 도대체 누굽니까?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욕할 거면 분리수거함이라도 놓을 것이지, 분리수거함 따위는 없다. 게다가 집주인은 신경이 거슬리면 우리 남편에게 전화해 10분 넘게 소리를 지른다. 집이 낙후해 싱크대 배관에 문제가 생긴 적이 있었다. 집주인에게 고쳐달라고 했더니 수리비를 반반 부담하자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집 어딘가가 삐걱거려도 군말 않고 살았다.


하지만 우리는 집주인의 호의를 받은 적도 있다. 4년 전 계약할 땐 남편 얼굴을 보더니 보증금을 조금 깎아줬다. 2년 전 재계약할 때도 보증금을 한 푼도 올리지 않았다. 임대차보호법 덕분이긴 했지만 보증금을 5%라도 올리려면 올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덕분에 우린 시세보다 저렴하게 살면서 돈을 모을 수 있었다.


아침에 열심히 정리한 분리수거물을 집 앞에 내놓았다. 그런데 30분 뒤 집주인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 분리수거를 이렇게 하면 어떡해요? 내가 그렇게 말했잖아요? 왜 사람 말을 안 들어? 으아아아아아악&#@%!!!!" 1층에서 집주인의 커다란 샤우팅 소리가 들려왔다. 남편은 서서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직접 1층으로 내려갔다.


집주인은 휴대전화에 대고 격앙된 목소리로 쏘아붙이고 있었다. 휴대전화 너머의 상대는 남편이었다. 내가 말했다. "사장님, 분리수거 제가 했어요." 그랬더니 집주인이 소리 지르면서 말했다. "제가 남편한테 투명봉투에 담아달라고 분명히 말했어요! 왜 종이백에 담아 내놓았냐고요?" 집주인은 계속 소리를 질렀다. 나는 그런 말을 듣지 못했지만 그렇게 말하면 우리 남편에게 화가 쏟아질까 봐 듣고만 있었다. 집주인의 얼굴이 화로 속의 고구마처럼 새빨개지고 있었다. 어엇! 이러다 이 아저씨 쓰러지면 어쩌지?


나도 화가 나서 대꾸했다. "우리처럼 분리수거 열심히 하는 사람은 없어요. 차라리 분리수거함을 만들어 주세요." 집주인은 분리수거함 놓을 자리 따위는 없다면서, 날더러 분리수거함이 있는 집으로 어서 이사 가버리라고 소리 질렀다. 이렇게 내 면전에서 악 쓰는 사람은 내 인생에선 사회 초년생 때 만난 직장 상사 다음으로 두 번째였다. 집주인이 악 쓰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나는 세입자의 덕목을 잊어버리고 울면서 소리 질렀다. "우리 남편한테 소리 지르지 말아요!!" 잠시 대화가 멈췄다. 남편은 내 뒤통수를 쓰다듬더니 나를 다시 올려 보냈다. 임신 기간 내내 줄곧 행복했고 편안했는데, 아이에게 이런 고성을 듣게 하다니. 게다가 나도 큰소리를 내버리다니.


10분 뒤쯤 남편이 집으로 올라왔다. 잘 해결됐는지 남편의 얼굴은 말끔하고 개운해 보였다. 집주인이 자기 집에서 투명 봉투를 많이 가져와 남편에게 줬고 남편과 같이 분리수거를 정리했다는 얘기였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너는 마음도 참 좋다." 그러자 남편이 대답했다. "임신한 사람한테 그러는 건 정말 잘못이지. 하지만 나는 집주인아저씨한테는 화가 별로 안 나. 아저씨를 이겨서 뭐 할 거야. 안쓰럽잖아. 물론 내가 안쓰러워하는 것을 알면 오히려 상대방은 싫어할 수도 있겠지만."


남편이 웃으며 말했다. "이왕 내려올 거면 의연하게 내려오지. 울면서 소리치면서 내려오면 어떡해? ㅋㅋ" 그러고는 남편은 덧붙였다. "하지만 그 장면을 내 평생 오래오래 기억할 거야."


연애 때는 서로 좋은 것만 보여주려고 애쓰는데, 결혼하면 궁상맞은 상황도 맞닥뜨리게 된다. 신기하게도 좋은 것만 함께 경험하려 했던 연애 시절보다는, 지금이 오히려 더 애틋하고 사랑이 깊어진다. 앞으로도 더 그러겠지? 아침의 부부싸움은 칼로 물베듯 끝났고, 우리는 순식간에 화해하고 초밥을 먹으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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