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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르키 Nov 27. 2022

성별은 궁금하지 않아

임신 13주, 성별은 아무래도 좋다

13주 2일 차, 오늘 아침엔 병원에서 1차 기형아 검사를 받고 왔다.


아침 8시 50분에 병원에 도착했다.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의 산부인과다. 5분 정도 의자에 앉아 쉬었다가 혈압과 체중을 쟀다. 그리고 검사실에 들어가 초음파를 봤다. 의사는 먼저 초음파로 아기의 코와 뇌와 두개골이 잘 발달했는지 확인했다. 아기는 3주 전보다 훌쩍 자랐다. 아직 2등신이지만 드디어 사람 모습을 갖췄다. 키는 이제 7cm를 조금 넘었다. 아기는 팔다리를 휘저으며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의사도 기분 좋게 얘기해줬다. "아이가 활발하네요. 코와 두개골, 탯줄, 양수 양도 모두 정상이에요." 12~15주 사이에 받는 1차 검사에선 아이의 '목 투명대'라는 것을 봐야 한다고 했다. 대략 2mm보다 적으면 의학적으로 큰 문제없다고 보는 모양이었다. 아기의 목 투명대는 1.2mm였다. 그저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아기는 팔다리와 엉덩이를 씰룩씰룩 움직였다. 꼭 아기가 물 안에서 춤추는 것 같았다. 내 뱃속의 아이여서 그런지 순간순간 모든 모습이 귀여웠다. 산모들이 커뮤니티에 올리며 자랑하는 초음파 사진이나 백일 사진엔 냉담했던 나였다. 그들은 도무지 귀여운 구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천편일률적인 사진을 올려놓곤 "아기 천사 같아요."라는 말을 듣고 싶어 했다. 그러나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초음파는 달랐다. 눈코입이 아직 보이지 않아도 좋았다. 어쩐지 웃음이 나고 눈물도 조금 맺혔다. 나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마음이었다. 그저 내 배 안이 아기에게 가장 따뜻하고 안전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가슴이 뜨뜻해졌다.


"초음파로 더 궁금한 것 있으세요?" 의사가 몇 번이고 물었다. 알려줄 것은 다 알려준 것 같은데, 뭘 더 물어봐야 할지... "아기가 편안하게 지내고 있나요?" 그랬더니 의사가 웃으며 말했다. "네, 편안해 보여요." 그렇게 초음파가 끝났고 피검사도 마쳤다. 집에 돌아와 습관처럼 '마미톡'이란 앱을 열었다. (병원에서 깔라고 했던, 초음파 영상을 올려주고 커뮤니티 기능도 갖춘 앱이다.) 그 사이 12~15주 산모들의 새로운 게시물들이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새 글이어도 내용은 대개 비슷했다. "각도법 고수님 알려주세요." "우리 아이 성별 뭐 같으세요?" "병원에서 알려줬어요. 초음파만 봐도 티가 나서." 그제야 우리가 성별을 물어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 의사가 몇 번이고 궁금하면 물으라고 했던 게 그런 것이었을까? 그러나 나는 성별이 전혀 궁금하지 않다. 정말로. 전혀... 아기가 여자니 남자니 상관없이 편안하게 보낼 수 있는 시간을 가급적 더 많이 확보해주고 싶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아기는 남자애여도 치마 입고 싶어 하면 치마 입힐 거야. 울고 싶으면 실컷 울게 할 거야. 여자여도 축구 특공무술, 하고 싶어 하면 다 시켜줄 거야." 그러자 남편이 대답했다. "요즘은 다 그렇지. 성별 따져서 그렇게 분리해서 하나? 예전보다 나아졌어."


초음파 영상을 양가에 보내기 위해 다시 보았다. 남편의 손을 잡고 말했다. "아기가 춤추고 있어." 남편은 팔을 올려 아기가 움직이던 모습을 흉내 냈다.


나는 춤추고 보는 것 모두 좋아한다. 지난해 가을, 시간이 남을 때 3개월 동안 봉산탈춤을 배웠다. 어느 순간부턴가 재미가 붙어서 그 시간을 기다렸었다. 등에 땀이 촉촉이 솟아나기 시작하면, 쪼그려 앉았다가 벌떡 일어나는 어려운 자세를 할 수 있다. 그때 나이 든 교수님이 이렇게 말했었다. "이 자세가 임신에 아주 좋아요."라고. 당시엔 웬 성희롱 같은 발언이냐 싶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이 꼭 맞는 듯하고 그때 키워둔 다리 근육에 그저 감사할 뿐이다.


내 몸은 조금씩 변하고 있다. 허리 두께가 두꺼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아직 배는 불러오지 않았다. 낮에도 틈 나면 잠이 쏟아진다. 마음도 변한다. 지금까지 내겐 나의 성취와 앞날이 가장 중요했었다. 그래서 직장에서 뜻대로 인정받지 못하면 크게 모욕당한 듯 괴로워했었고, 미래엔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하며 전전긍긍했었다. 하지만 요즘은 쉽게 화도 나지 않고, 뭐라고 말해야 할까... 뻔한 말을 하고 싶진 않지만, 그저 고마운 마음이다. 그저 건강하게. 건강하게. 감사하게. 이 말을 반복하게 된다.


그리고 슬프고 고통스러운 뉴스를 보면 가슴이 아프다. 모두가 엄마 뱃속에서 열 달 따뜻하게 지켜진 사람들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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