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17주, 피아노에 관한 앞서나간 상상
우리 부부는 4월 말에 이사할 계획이다.
4년 살아온 전셋집의 계약이 곧 만료된다. 내 출산 예정일은 5월 말. 아기 침대와 매트를 놓을 만한 집을 알아보고 있다. 자연스레 새로운 사람이 찾아올 우리집의 모습을 상상하게 된다. 젖병 소독기를 살 지, 장난감은 무엇으로 고를지, 이유식 레시피북을 어디에 꽂아둘 지... 30대 중반에 찾아온 아이라 모든 게 신기하고 조심스럽다. 카톡이나 SNS로 요란스레 알리기도 어쩐지 쑥스럽다. 그래서 얼굴 종종 보는 친구와 지인에게만 살짝 알렸다. 축하와 출산 선물을 받으면서 설렘도 함께 커진다. 신생아 베냇저고리, 분유 포트, 아기 체육관('국민 육아템'이란다.), 애착 인형, 육아 책 등. 이 물건들을 쓸어보며 조금씩 실감한다. 이제 우리가 엄마 아빠가 되는구나.
아기가 3살이 되면 친정에서 피아노를 가져오고 싶다. 9살 때 부모님이 내게 사준 삼익 피아노다. 그때 가격으로 200만원이 넘었다고 했다. 당시 우리 가족 형편엔 말도 안 되는 사치품이었다. 부모님은 첫째인 나를 위해 가능하면 해주고 싶어했던 것 같다. 내 것이 된 피아노 건반 88개를 헤아리면서, 그 피아노로 체르니와 하농부터 바흐, 모차르트, 베토벤, 쇼팽을 연습했다. 아빠가 좋아하는 가곡과 엄마가 좋아해는 트로트도 연주해드렸다. 나는 손가락을 두드리면 흘러나오는 피아노 소리가 좋았고, 그런 나를 바라보며 행복해하는 부모님이 좋았다.
나는 7살 때부터 13살까지 동네 피아노 학원에 다녔다. 우리 엄마보다 몇 살 어린 젊은 여자 원장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그녀는 항상 피곤해 보였고 가끔씩 자신의 어린 아기를 원생들에게 돌봐달라고 했었다. 조금은 엉터리 같은 학원이었다. 그래도 동네 친구들과 재밌게 다녔다. 나는 그 학원에서 도레미부터 배웠다. 원장은 악보에 동그라미 5개를 그려놓고 한 곡 연습을 끝내면 동그라미 하나를 색칠해줬다. 피아노를 치고 있으면 밖에서 동네 애들이 놀자고 내 이름을 불렀다. 그럼 나는 뛰어나가 잠시 놀다가 다시 들어왔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엄마가 내게 말했다. “이제 피아노 배울 만큼 배웠지?” 나는 그렇다고 했다. 부모님은 내게 경제 사정을 일일이 얘기하진 않았다. 나도 눈치로 그 정도는 알았다. 아빠가 운영하던 양복점은 빚을 남기고 문을 닫았다. 우리집에서 함께 살던 친척들도 생활비를 보탤 형편은 아니었다. 피아노를 그만두는 것에 딱히 미련은 없었다. 내가 옆집 친구보다 피아노를 잘 치는 편도 아니었다. 그즈음 나는 요정 키우기 게임과 소설 읽기에도 흥미를 붙이고 있었다. 학교 방과 후 영어교실에서 배우는 영어 게임도 재밌었다.
어쨌든 10대 시절 피아노는 나의 즐거움이었다. 누구도 내게 피아노를 잘 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피아노는 내가 정복하거나 경외하거나 부담스러워할 대상이 아니었다. 오히려 쌓여가는 문제집들을 해치우란 요구를 받았다. 그럭저럭 느슨하게 좋아했던 덕에, 학교에서도 내게 피아노 연주를 맡겼다. 초등학교 학예회에서도, 고등학교 동아리 연주회에서도 피아노를 쳤다. 3월에 학교에 신입생이 입학하면 교가와 애국가를 반주하러 가기도 했다. 어떤 애들은 왜 내게만 그런 것을 시켜주냐면서, 나를 흘겨보거나 선생님에게 따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주목받는 자리, 피아노 의자 위를 참 좋아했다.
지금은 친정의 김치냉장고 옆 붙박이가 된 피아노. 엄마가 자주 닦아줘서 피아노엔 먼지 한 톨 쌓이지 않았다. 예전부터 엄마는 내게 말했었다. “너희 아빠가 이걸 몇 번이나 팔자고 했었어. 그때마다 내가 이것만은 절대 못 판다고 했어. 우리 아라 결혼할 때 줘야 한다고.”
‘아기가 나중에 자라서 피아노 콩쿠르에 나가겠다면 어쩌지?’ 아직 뱃속에 있는 조그마한 아기를 들고 별별 상상을 다해본다. 이렇게 나도 고슴도치, 가시고기 엄마가 되어가는 걸까…? 그러자 남편이 말했다. “그럼 나중에 아이한테 솔직히 말해주자. 피아노를 계속 하려면 얼마만큼의 돈과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아이도 그걸 알면 자기 선택에 대한 책임감이 커질 거야.”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자기 재능을 검증받아야 할 시간도 필요할 테고, 굳이 전공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음악을 즐길 방법은 많다. 얼마 전엔 쇼팽 콩쿠르 파이널에 진출한 일본의 남자 공대생을 유튜브에서 봤다. 예술가의 길이란 반드시 대학에서 전공하고 직업을 갖는 것만은 아니다. 최초의 음악가는 대학을 나온 사람이 아니라 풀로 피리를 만들어 불고 모닥불을 빙빙 돌며 춤추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너무 앞서 상상해버렸지만…. 우리집에 음악이 흐르고, 우리 부부와 아이가 함께 노래하며 춤추는 상상을 해본다. 아이가 잘 하든 못 하든 상관 없다. 그 실력이 쓸모가 있든 없든 아무런 상관 없을 것 같다. 그저 우리 가족이 음악과 예술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나는 아기의 손가락에서 나올 음악과 그림을 경이롭게 바라볼 것이다.
내가 아기를 바라보는 마음으로 그렇게 나 자신도 관대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어쩐지 내 인생도 달라질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