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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르키 Mar 19. 2023

낯선 이를 따라가면 시작되는 모험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고 

글보다 영화나 만화로 봐야 훨씬 좋은 작품들이 있다. 영화 <스즈메의 문단속>도 그랬다. '이래서 영화가 좋지, 극장이 좋아.' 스크린에서 쏟아지는 빛과 풍경을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영화가 있어서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보면서 인상 깊었던 점, 낯선 사람들과 도움을 주고받는 스즈메의 격의 없는 태도였다. 


스즈메는 일본 규슈의 조용한 바닷가 마을에 사는 고등학생이다. 마흔 살 이모와 단 둘이 산다. 영화는 어린 스즈메가 들판에서 엄마를 찾아 헤매는 꿈으로 시작한다. 스즈메의 엄마는 스즈메가 어릴 때 돌아가셨다. 


다음날 아침, 꿈에서 깨어난 스즈메는 이모가 챙겨준 도시락을 들고 학교에 간다. 자전거를 타고 언덕을 내려가다 낯선 젊은 남자를 마주친다. 남자 이름은 소타. 그는 스즈메를 불러 세워, 영문 모를 질문을 던진다. "여기 폐허 있니? 문을 찾아야 해." 스즈메는 산 너머를 가리킨다. 산사태로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이 있다. 스즈메의 얼굴이 빨개진 것을 보면 소타에게 첫눈에 반한 듯하다. 


용감한 스즈메는 학교 가던 길을 멈추고, 소타가 향하고 있을 산속 폐허로 향한다. (나라면 무서워서 못 그럴 것 같다...) 폐허가 된 마을에 도착한 스즈메는 그곳에서 정체불명의 문을 발견한다. 문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환하고 아름다운 밤하늘빛이 보인다. 하지만 문 안으로 들어가면 밤하늘은 사라져 있다. 문 안은 자기가 서 있던 그 자리 그대로다.


하지만 여기에서 스즈메가 벌인 어떤 행동이 자연재해(지진)를 불러온다. 정확히 말하면, 예정된 자연재해를 심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게다가 스즈메의 행동은 소타에게도 영향을 미친다. 뜬금없이 소타가 갑자기 사람에서 나무 의자(스즈메의 어머니가 남긴 유품)로 변해버리고 만다. 


결국 스즈메는 의자로 변한 소타를 데리고, 일본 전역의 뒷문을 닫으러 다니는 모험을 떠난다. 그 문은 바로 '미미즈'(지진을 일으키는 붉은색 용처럼 생긴 존재)가 드나드는 곳이다. 문이 열리고 미미즈가 땅으로 떨어지면 대지진이 일어난다. 


<스즈메의 문단속>은 재난에 관한 새로운 관점을 보여준다. 일본은 지난 100여 년 동안 큰 지진을 여러 차례 겪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가족을 잃었다. 하지만 영화는 재난을 인간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누구의 탓도 아니다. 신이 분노해서도 아니다. 그저 일어났을 뿐이다. 영화는 사람이 발길이 끊어진 어딘가에, 자연재해의 신이 있다는 상상을 펼친다. 이 신은 선악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다. 신을 가둬둔 문이 열리면 재해가 일어난다. 그리고 소타의 가족처럼, 몇 백 년 동안 가업 대대로 신이 드나드는 문을 단속하는 사람들이 있다.  



소타가 의자로 변한 이유 

스즈메의 모험을 위해  

공들여 만든 멋진 남자 캐릭터를 의자로 만들어 버리다니. 하지만 소타가 의자가 되지 않았더라면, 스즈메는 놀라운 모험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귀엽지만 만악의 주범으로 추측되는 고양이 '다이진'을 쫓아, 스즈메는 규슈에서 에히메로, 고베로, 도쿄로 향한다. 모험하며 스즈메는 여러 낯선 사람들을 만난다. 거리낌 없이 도움을 받고 자기도 도움을 베푼다. 숙소를 제공받고 히치하이킹도 한다. 대신에 스즈메도 그들을 돕는다. 자기를 도와준 사람들의 집안일과 육아와 생업에 동참한다. 나였다면 감히 도움을 청하지 못했을 테다. 사는 지역도 살아온 배경도 다른 낯선 사람들을 어떻게 믿으라고!   


스즈메를 도운 사람들은 완벽하지 않다. 비 오는 도로에서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던 스즈메를 차에 태워준 사람은 아이 엄마이자, 밤엔 술집을 운영하는 호스티스다. 스즈메에게 잠시 아이를 봐달라거나 가게 일을 도와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릴 돕는 사람의 직업이 선생님이나 공무원이나 의사가 아니라, 호스티스일 수도 있다.


스즈메의 이모는 엄마 잃은 조카를 헌신적으로 돌본다. 하지만 스즈메를 키우는 동안 자기 인생도 사라져 버린 것 같아 힘들었다고도 토로한다. 


소타는 자신의 가업인 문단속 일에 큰 사명감을 지닌 사람이다. 그러나 이 가업이 죽음의 기로를 불러오자, 그 앞에서 하는 생각은 '살고 싶다...'였다. '목숨을 버려도 이 일을 완수하겠어.'가 아니었다. 


나였다면 스즈메처럼 모험할 수 있었을까? 스즈메는 자의식이 두드러진 사람이 아니다. 이를테면 낯선 친구를 사귈 때에도 이렇게 말하는 법이 없다. "나 mbti가 I로 시작해서 미안해. 먼저 잘게..." "죽는 것이 두렵지 않아?"라는 소타의 질문에도, "두렵지 않다."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그 말대로 움직이는 용감한 소녀다. 영화 후반부에선 그것이 큰 재난, 동일본대지진을 겪은 사람에게서 나온 초연함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반면에 나는 낯선 사람을 향한 경계심이 높다. 예측 불가능한 사람, 확인할 수 없는 정보가 불편하다. 코로나 이후에 더 심해졌다. 모르는 사람은 내게 병을 옮길 수도 있는 정체불명의 위험인자가 됐다. 점점 검증된 사람, 안전한 사람, 아는 사람과만 어울린다. 


나였다면 스즈메처럼 한눈에 반한 낯선 남자의 발자취를 따라 산속 폐허에 가지도 않았을 테고, 의자가 된 그를 들고 배를 타지도 않았을 것이다. 낯선 지역의 산 도로에서 히치하이킹하는 일도, 모르는 아이 엄마의 차를 얻어 타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테다. 나를 해칠지도 모르는 낯선 사람이니까.


극장에서 집에 돌아오는 길. 우리 집 앞에서 폐지 줍는 할머니가 바닥에 흩어진 폐지를 주워 담고 있었다. 차가 오면 곤란할 것 같았다. 할머니가 허리를 숙이는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일방통행도로였고, 저 멀리에서도 차는 보이지 않았으며, 떨어진 폐지도 몇 장 없어 보였다. 무엇보다도 낯선 사람에게 다가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때 어떤 안경 쓴 남자가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도와드릴게요." 그는 웃는 얼굴로 떨어진 폐지를 주워 리어카에 올렸다. 


나는 낯선 사람을 향해 웃은 적이 있었나? 스스로 여러 이유를 댔지만 사실은 나의 차가운 마음이 원인이다. '내 일이 아니야. 낯선 할머니의 일이잖아...' 어느새부턴가 나는 남의 일과 내 일을 가른다. 남과 나를 가른다. 특히 모르는 사람에겐 몸과 마음의 벽을 훨씬 높이 세운다. 낯선 이들은 사물이나 다름없어진다.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다. 고등학생 때는 바닥에 앉아 울고 있는 여자의 지갑을 훔친 소매치기를 잡으러 뛰어갔다. 몇 년 전엔 지하철에서 젊은 여자의 머리를 치며 시비 거는 할아버지를 경찰에 신고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어떤가. 남에게 무관심하다. 남과 얽히지 않으면 내 안전함이 보장된다고 믿는다. 그러나 정작 고립되는 사람은 내가 아닐까? 이렇게 살다 간 한 뼘에 불과한 좁은 세상에서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나는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우정을 만들어갈 수 있을까? 어떻게 상대로부터 인생을 배울 수 있을까? 나는 먼저 낯선 이에게 웃음을 건네는 법, 도움을 주고받는 법부터 배우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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