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를 구경하다 이 영화가 떠올랐고 아빠가 생각났다.
요즘은 갤러리 구경이 재밌다. 집에서 30~40분 이내에 갈 수 있는 갤러리들이 있다. 버스를 타고 안국역이나 덕성여중고 앞에서 내린다. 경복궁 돌담길을 따라 삼청동 쪽으로 걸어간다. 걷다가 종종 계획 없이 국립현대미술관, 학고재, PKM갤러리 등에 간다. 엊그제는 PKM갤러리에 들어갔다. 작가 이원우의 개인전 '당신의 아름다운 미래'가 열리고 있었다.
들어가자 인스타 썸네일(...) 같은 문구와 사진들이 걸려 있어서, '이게 맞나?' 싶어 눈을 비비며 다시 봤다. 하지만 창작품에서 맞고 틀리는 게 어디 있을까. 각자 재밌고 좋아하는 것을 능력껏 자유롭게 만들면 되지. 이 작가는 이 단어에서 이 색감을 상상했구나,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의 모임은 아마도 단연 SUMMER DANCE. 이것을 보면서 얼마 전 봤던 영화 <애프터 썬>이 떠올랐다. 서른 살 아빠가 열한 살 딸의 생일을 기념해 여름 며칠 동안 터키를 여행하는 내용이다.
내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 아빠가 춤추는 장면이다. 부녀는 리조트에서 온종일 수영하고 오락하고 실컷 놀았지만, 해 질 녘엔 두 사람 다 왠지 쓸쓸해지고 말았다. 매일 살아나가야 하는 생활은 언젠가 끝날 휴가와는 다르다. 어린 딸의 눈에 아빠는 이상한 구석이 많다. 여행지에 명상 책을 들고 오고, 길에서 기 체조를 한다. 돈이 넉넉지 않은 서른 살 아빠는 멋진 아빠가 되고 싶다. 딸은 아직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버거움과 우울한 그림자가 아빠에게 드리워져 있다.
아빠는 춤 춘다. 어린 딸의 눈에 비친 그 모습은 우스꽝스러울지도 모른다. 훗날, 그 시절 아빠 나이만큼 훌쩍 자란 딸은 이젠 젊고 연약했던 아빠를 껴안아주고 싶어 한다. 영화가 끝난 뒤에 나도 우리 아빠를 떠올리게 됐다. 아빠, 어릴 적엔 가까이 보면서도 전부 다 이해할 순 없었던 사람이다.
어릴 적 우리 남매는 아빠 차 타고 주말마다 여기저기 많이 놀러 다녔다. 봄엔 다 같이 강화도에 쑥 캐러 가서 방앗간에서 쑥떡을 만들고, 여름엔 강에서 물놀이, 가을엔 밤 따고, 겨울엔 꽁꽁 언 저수지에서 아빠가 만들어준 나무 썰매를 타고 놀았다. 내 눈에 아빠는 도시보다는 자연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주말마다 우리를 데리고 가는 산과 개울에서 아빠는 훨씬 편안해 보였다. 우리 집은 빠르게 변화하는 대도시에 있었고, 종종 아빠는 방안에 무기력하게 누워있곤 했다. 지금의 나라면 젊은 시절의 아빠를 안아줄 수도 있을 텐데. 그땐 왜 그렇게 부족한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는지 모른다.
그래서 SUMMER DANCE를 보며 아빠를 떠올리게 된 것 같다. 주말에 실컷 놀다가 아빠 차 타고 집으로 가는 차 안, 내일 아침이면 학교에 가야겠구나 하는 불안감, 창밖에 비쳤던 저녁 어스름이 떠오르는 색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