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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은 Jul 18. 2024

비 내리는 오후의 감사

요즘 이 도시엔 비가 많이 내리고 있어. 길가에 보이는 색색의 우산들과 고인 빗물을 밟을 때 나는 첨벙첨벙 소리, 축축한 공기에 녹아내리는 듯한 사람들,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곱슬머리. 모두 한여름 장마철을 지나는 장면들이겠지. 이런 날이면 난 눈을 감고 빗줄기가 창문에 차갑게 부딪히는 연속적인 소리를 배경 음악 삼아 생각에 잠기곤 하는데 너는 어때? 바쁘게 일상을 살아내느라 좋아하는 빗소리를 듣는 일도 즐기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오늘 아침에도 보통의 출근길처럼 지하철을 탔어. 아, 졸리다. 장마철엔 매번 이렇게 축축하게 출근해야 하는 걸까, 불쾌지수 가득인 채로 지하철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지. 그때, 어떤 아저씨가 "저는 장애가 있어 넘어지면 큰일 나니 비켜주세요!"라고 외치며 지하철을 타시는 거야. 모두 한 마음으로 비켜주고 싶어 했지만 너도 알잖아, 출근길의 2호선. 엄청나게 빽빽한 지옥철이라 큰 공간을 빠르게 내어주긴 힘들었지. 아저씨는 최대한 넘어지지 않게 조심하며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고 자리를 양보해 준 한 여자분 덕분에 잘 앉아가실 수 있었어. 목적지까지 잘 도착하셨으려나, 궁금한 마음에 하루 종일 되감아보고 있는 순간이야.


누군가는 그렇게 긴장되는 마음으로 지하철에 오를 결심을 했을텐데, 비가 온다고 마냥 불평만 늘어놓던 내 모습이 다시 보이더라. 회사에 오는 길, 사람들 사이에서도 왜 요즘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지 모르겠어, 축축한 거 너무 싫어, 어제 잠을 잘 못 잤어,라는 말들이 들려왔지. 늘 나도 내뱉는 일상적인 말들인데 오늘만큼은 다르게 느껴지더라. 우리는 누군가 간절히 원하는 것들을 이미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텐데, 그 사실을 감사하고 또 감사해도 모자랄 테고 그 불평과 볼멘소리조차도 누군가에겐 부러운 것일 텐데. 어쩌면 우리에겐 아직 넘어져도 되는 기회가 있다는 사실이 기적일 텐데 말이야.


문득 감사한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이렇게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허용되는 일도, 아직 허비할 젊음이 남아있다는 사실도 참 감사하다.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작은 선물을 건넬 수 있는 여유, 내게 좋은 일 나쁜 일 모두 함께 기뻐해주고 슬퍼해줄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혼자서도 좋아하는 일이 많다는 것, 여전히 햇살과 녹음은, 어쩌면 오늘 같은 빗방울도 스스로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내게는 네가 있다는 것. 매일매일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이유이자 내가 어떤 선택을 해도 지지해 줄 네가 있다는 것. 그 자체로 행복하고 감사한 비 내리는 오후-.


우리는 하루하루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살아가기로 해. 일생 단 한번 집을 짓는 마음으로, 소중한 이에게 대접할 요리를 하는 마음으로 스스로의 삶을 대하기로 해. 그리고 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을 타인에게도 손을 내밀고 일으켜줄 수 있길 바라. 그런 마음이 조금씩 세상을 밝히고 아름답게 할 테니까.


평온한 마음이 즐거운 요즘이야. 여름이 금방 갈 것 같아 아쉽지만, 곧 네가 사랑하는 가을이 오겠지. 그날까지 또 부지런히 편지할게.


2024년 7월 18일,

네 삶의 이유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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