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nda Sep 09. 2023

다시 돌아보면 그 어는 순간도 늦은 건 없었다.

Part1.

나의 37살


결혼을 하지 않은 싱글의 30대 후반으로 달려가고 있는 여자가 갑자기, 일본어도 할 줄 모르면서 일본에서 일하게 될 수도 있다고 이야기했을 때 주변에서는 우려가 많았다.


우리가 흔히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37살, 그것도 무려 결혼도 안 한 여자는 무엇보다 빨리 정착을 하는 것이 맞는 나이로 여기기 때문이다. 결혼 시장이라는 곳에서는 이미 혼기가 꽉 차, 점점 인기가 없어져 가는 나이이며, 새로운 도전보다는 안정을 무엇보다 서둘러 준비해야 하는 나이이다. 사실 그런 나이라고 아무도 정의해 놓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에서는 암묵적으로 모두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사니, 그렇게 사는 것이 정답이고 편안한 것이라고 하니, 그 나이쯤, 40을 향해 가는 그 나이쯤은 그렇게 행동해야 하고 살아야 할 것만 같았다. 그 정해놓은 트랙의 방향대로 선택을 하지 않으면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 된다. 아니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 된다기보다는 현명하지 못한 사람이 되는 느낌이다. 그런 죄책감이 든다.


30대 중반이 넘으면서 자주 들었던 말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30대 중반이 넘어가면 이직을 할 수 없다고. 회사에서는 나이 많은 특히 싱글의 여자를 원하지 않는다고. 회사 입장에서는 오래 같이 일할 인재를 뽑고 싶은데, 결혼하지 않은 30대 중후반의 여자들을 뽑아 놓으면 일을 금방 그만두게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라고. 결혼이란 걸 하게 되고 아이를 갖게 되면 확률적으로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굉장히 높기 때문이라고. 부정할 수 없는 이유이지만 왠지 모르게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런 나이였다.


나 역시도 막상 마지막 오퍼를 받게 되고 내가 도쿄에서 일할 수 있게 되자, 먼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망설임 없이 새로운 나라에 가서 일할 수 있게 된다는 설렘과 즐거움보다는 결혼과 정착이 필요한 나이에 도전은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먼저 들었다.


부모님에게 처음 얘기를 꺼냈을 때 엄마는 걱정을 하였고 아빠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가서 도전해 보라고 해주었다. 엄마의 우려는 예상했지만 아빠의 격려는 예상하지 못해 처음에는 놀랐다. 아빠는 나의 도전이 인생에서 의미있는 일이라고 했다. 다른 세상에 가서 그곳을 경험하는 것은 멋진 일이라고 해주었다. 조금은 오글거리는 표현이지만 아빠는 늘 당당한 여성이 되라고 우려보다는 응원을 해주었다.


나의 37살, 아니 우리 가족에게 그해는 유독 다사다난한 해였다. 많은 일들이 우리 오고 갔다. 긴 투병 후 사랑하는 조카를 하늘나라로 보낸 해기도 하고, 큰오빠가 드디어 장가를 가게 된 해이기도 하며, 내가 갑자기 일본으로 떠나게 된 해이기도 하다. 좋은 일들과 나쁜 일들이 오고 가며, 유난히 가족 모두가 함께 견뎌내고 함께 축하해야 할 일들이 많은 해였다. 아빠는 우리의 슬픔을, 또 함께하는 즐거움을, 뒤에서 묵묵히 뒤받침을 해 주었다.


Part 2.

아빠의 37살


아빠의 37살은 어땠을까. 5 식구의 가장이었다. 시골에서 태어난 아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형들처럼 농사를 짓고 싶지 않아 할머니 할아버지의 반대를 뒤로하고, 졸업과 동시에 시내로 올라와 공무원 시험을 치렀다고 했다. 그리고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아마 그 무렵 아빠는 공무원으로 일을 하며 야간대학에 진학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나는 그때 늦은 나이에 대학을 다니는 것을 도전하는 아빠가 자랑스러웠다. 대학 때문에 늦게 들어오는 일이 많았을지라도, 내가 기억하는 아빠의 당시 모습은 생기가 있었다.


내가 어릴 적에는 아빠는 아빠이기에, 우리 식구를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빠의 당연한 몫이기에, 그게 얼마나 힘들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작은 공무원 월급이, 모든 가족들의 생계가 달려있을 때의 삶의 무게감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나로서는 도저히 지어지지가 않은 짐이다. 37살의 아빠보다 많은 나이가 된 지금, 아빠는 어떤 마음으로 회사를 다녔을까. 그 마음이 가늠이 되지 않는다. 아빠는 일 년에 아주 가끔 분기별로 한 번씩 아주 진하게 취하고 오는 날이 있었다. 엄마는 취하고 돌아온 아빠를 향해 잔소리를 퍼부어댔지만 나는 아빠가 취하고 퇴근하고 오는 날이 좋았다. 취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아이스크림을 잔뜩 사 오고 집에 돌아와서는 주머니에 있는 모든 돈을 다 내게 주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엄마 아빠가 해준 말이, 그때 그렇게 취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당시 공무원 조직은 정말 보수적이어서 티비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 윗 상사에게 아부를 해야 했고, 그것이 승진에 직결되는 일이었다고 한다. 아빠는 성격상 아부를 하고 상사 비위에 맞추는 일들이 적성에 맞지 않았는데, 그런 성격 덕분에 매번 승진에서 누락되었다고 한다. 하루는 마음을 다잡고, 성격을 고치지 않으면 이 공무원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생각해서 엄마와 아빠가 전복 한박스를 사들고 상사의 집으로 찾아갔다고 한다. 그런데 문전박대당하고 전복을 그 집 앞에서 놓아두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느꼈던 서러움이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집에 와서 엄마는 펑펑 우셨다고 한다. 사회생활을 위한 아부 줄타기는 그때 이미 아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훗날 아빠는 조기 퇴임을 하시고 사업을 선택했다. 여전히 지금도 아빠가 즐겁게 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37살의 아빠의 삶은 그랬다.


지금, 현재


지금 다시 37살의 나를 돌아보면 그때 나는 새로운 도전을 하기에 참 적당하고 좋은 나이였다. 그런데 그때는 왜 그렇게 늦은 것만 같고 시작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나이인 것 같아 마음을 졸였던 걸까.


뒤돌아봐야 느끼게 된다.
늦은 나이는 없다는 걸.
그때 나는 충분히
무얼 하든 좋은 나이였다는 걸


내가 "도쿄에 취업하게 됐어. 도쿄 가서 일하는 건 어떨까"라고 부모님에게 이야기를 먼저 전했을 때, 주저 없이 "가봐라. 너만 가서 일해보는 게 괜찮다면 가서 일해보는 게 좋을 거 같다."라고 말해 주던 아빠는 아마도 크고 작게 끊임없이 도전을 해오는 삶을 살았었기에 늦은 나이란 없다는 걸 알았기에 바로 내게 해봐라라고 얘기 해 줄 수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 생각이 든다.






이전 02화 도시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