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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nda Aug 12. 2023

나와 데이트하는 날

잘 차려입고 나왔다.

2023년 여름


집에서 할 일 없이 뒹굴 거리던 어느 주말이었다.

넷플릭스를 뒤져 보며 볼거리를 찾았고, 유튜브 비디오는 집중 없이 그냥 틀어놓았다. 그러던 중 한 외국 유튜버 영상을 보게 되었다.


제목은 “Solo date vlog”


내용은 그랬다. 한 유튜버가 하루 특정 날을 잡고 나와의 데이트를 하는 것이었다. 해당 유튜버는 나와 데이트를 약속한 날은 내가 누군가와 약속을 해서 데이트를 나가듯 그렇게 하루를 보낸다고 했다.

친구 혹은 남자친구와 약속을 해서 나가듯 잘 차려입고 어디서 밥을 먹을지 그리고 차를 마실지 정해 놓고 하루를 꽉 차게 내가 가고 싶은 곳 내가 하고 싶은 것들로 채운다고 했다. 종종 많은 사람들이 혼자 가서 밥을 먹거나 하는 경우 다른 사람들의 눈치가 보이지 않느냐고 그녀에게 물어본다고 했다. 그녀가 말하길, 사람들은 생각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다고, 또한 타인이 타인을 바라볼 때 그 이유가 무조건 부정적인 이유에 의해서 바라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굳이 타인의 시선에 위축될 필요가 없다고 했다. 왜냐면 우리는 주로 혼자 멋진 식당에 갈 때 혹은 혼자 영화를 보러 가기로 할 때, 먼저 드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혼자온 나를 불쌍하게 여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결론은 우린 사실 타인에게 그렇게 큰 관심이 없고, 혹은 누군가를 우리가 쳐다보는 경우는 부정적일 때보다는 긍정적일 때 보다 타인을 보게 된다는 것이다.


그냥 혼자 나가 밥을 먹는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살 것이 있어 잠깐 혼자 무얼 사러 나가는 일도 있을 수 있다. 혹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집에서는 집중이 되지 않아 카페 가서 볼일을 혼자 보러 가기도 한다. 그건 혼자만의 데이트에 치지 않는단다. 정말 특정날을 나와의 데이트날로 잡고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는 것, 그것이 진짜 나와 데이트하는 것이라는 그녀는 하루 온전하게 혼자만의 데이트를 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담았다.


Solo date라는 말이 내게 참 인상적으로 다가왔고, 정말 누군가와 약속을 하듯이 하루 나와의 데이트를 할 날을 정했다. 막상 특정 날을 지정해 이날은 온전히 나만을 위한 시간을 보내고, 평소 가고 싶었던 것들을 해야지 마음을 먹으니 설레기도 했고 그날은 정말 약속이 있는 것처럼 마음이 분주했다.


우선 생각한 것은 사고 싶었던 쇼핑 장소들을 먼저 가보기로 했다. 사실 그냥 가면 되는 거였지만, 약속 없는 어떤 날은 그냥 집에서 게으름을 피우느냐 굳이 찾아가 보지 않았고, 약속 있는 어떤 날은 상대방이 관심이 없을 수 있으니 선뜻 가보자고 말을 건네지 못했다.


온전히 나만을 위한, 내가 걷고 싶고,
내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볼 수 있는 날.


집 근처에 있는 가구점을 찾았다. 당장 살 것은 아니나 요즘 서랍장이 필요하다고 느꼈고 조금 괜찮은 서랍장을 하나 구매하고 싶었다.



몇 번 와서 구경한 적은 있지만 자세하게 둘러보지는 못했다. 오늘만큼은 찬찬히 가구들을 둘러보고 원목가구라 나무의 질감을 체크해보기도 했다. 그리고 만약 이 서랍장이 내 방에 있으면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 보기도 했다. 시간에 서두를 필요도 내가 보고 싶은 게 상대방이 보고 싶지 않은 것인지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내가 구경하고 싶은 만큼 천천히 여유를 두고 구경하면 된다.


가구점 맞은편에는 마르지엘라 매장이 있다. 매장이 특이하고 예뻐 매번 지나가면서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다. 약속이 있는 날은 약속 시간에 쫓겨 지나치면서 들르지 못했고 약속이 없던 날은 그냥 내 행색이 초라해 차마 들어가 구경하지를 못했다. 매장 안으로 들어가 신발을 신어보았다. 매장 안이 마치 갤러리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에비스에서 다이칸 야마까지 걸어갔다. 에비스에서 다이칸 야마까지는 그다지 멀지 않다. 걸어서 한 20분 정도. 예쁜 가게들이 많은 다이칸 야마. 천천히 매장들을, 사람들을 구경하며,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걸었다. 좋아하는 운동화 가게, 좋아하는 빈티지 가방 가게를 갔다. 다이칸 야마는 참 재미있는 동네이다.


다이칸야마에서 시부야까지 걸었다. 다이칸 야마에서 시부야 까지도 한 20-30분이 걸린다. 걸어가는 동안 이런저런 가게들을 하나씩 구경하며 걷다 보면 그다지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시부야를 오니 또 금세 에비스와 다이칸야마와는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일요일이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시부야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집부터 시부야까지 꽤 많이 걸었다. 시부야에 있는 미야시타 피크빌딩에 있는 카페에 갔다. 따뜻한 아메리카노와 아이스크림을 시켰다. 나는 얼죽아 반대파라 더운 날에도 무조건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또 꽤 많이 걸은 탓에 당이 떨어져 단것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달달한 아이스크림을 먹고 나니 기운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다. 요즘 읽고 있는 책도 한 권 챙겨 나왔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책을 조금 읽어본다. 재미있는 책을 만나는 건 참 신기한 인연과도 같다. 푹 빠져서 책 속 주인공의 마음처럼 그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는 내가 아닌 주인공 삶 속으로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 든다.


그녀는 겨드랑이에 책을 끼고 거리를 산책하는 것을 즐겼다. 책은 그녀에게 19세기 멋쟁이들이 들고 다녔던 우아한 지팡이와도 같았다. 책을 통해 그녀는 남과 자기를 구분 지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중, 밀란 쿤테타


다시 나와 시부야를 걷다 가을에 입을 만한 스웻 셔츠를 하나 샀다. 40% 세일을 한다기에 주저 없이 구매했다. 도쿄에서 힙한 신발가게도 들렀다. 사고 싶었던 아디다스 운동화가 마침내 사이즈가 있어 바로 구매. 예쁜 운동화와 스웻 셔츠를 구매하니 머릿속에 가을에 입을 만한 코디가 그려진다. 더위가 풀리면 청바지와 함께 얼른 입고 싶다.


한창 여름. 걷다 쉬다 걷다 쉬다를 반복하다 보니 더위도 참을만했다.


주중 내내 매콤한 쫄면이 먹고 싶었다. 도쿄의 한인 타운인 신오오쿠보에 가면 분명 쫄면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지하철을 타서 신오오쿠보로 갔다. 마침 친구가 신오오쿠보에 있다기에 함께 저녁을 먹었다. 나와의 데이트는 쫄면을 먹으며 그렇게 마무리했다.

나와 데이트이고 하나의 약속이라고 생각하니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누군가와 약속을 해서 함께 있을 때 상대방의 눈치를 본 것처럼 나는 나의 눈치를 보았다. 내가 무얼 하고 싶은지, 내가 어떤 것이 먹고 싶은지, 내가 지금 기분이 어떤지, 쉬고 싶은지, 내가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 마음이 원하는 것에 따라 움직였다. 참 즐거운 데이트였다.


나는 나와의 관계를 그 무엇과의 관계보다 소중히 할 필요가 있다.


모든 관계의 시작은 내가 나와의 관계에서 오는 안정감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혼자일 수는 없다. 누군가와 함께여서 오는 즐거움이 있다. 동시에 나와의 관계도 잘 쌓아가면 타인으로 부터오는 실망감을 나로 채울 수 있지 않을까. 다음 나와의 데이트 일정을 잡으며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낼까 계획을 세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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