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속의 존재
그림자 속의 존재
단청이 상대해야 할 자는 한 명이 아니었다. 숲 속의 어둠이 한층 짙어지며 또 다른 그림자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 자의 몸에는 검은 두건이 헐겁게 씌워져 있었고, 눈동자는 비늘을 닮은 듯 서늘하게 빛났다. 나뭇잎 하나 흔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도 그의 기운은 날 선 칼날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태을진인, 너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다."
낮게 깔리는 목소리. 그 한 마디가 공간을 짓누르는 듯했다. 사천이 옆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도 경계가 서렸다. 단청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검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지만, 이런 자가 흑혈문에 몸담고 있다는 사실이 불길했다.
"너는... 천무괴(天武怪), 그 이름을 다시 듣게 될 줄이야."
그 이름을 들은 순간, 사천의 검 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흑혈문의 고수조차 긴장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천무괴. 그 이름은 오랜 세월 잊힌 것처럼 보였지만, 무림의 이면에서는 전설처럼 내려왔다. 한때, 그는 천하제일의 암살자로 군림했고, 흔적도 없이 적의 숨통을 끊는 데 능했다. 그의 살기는 바람처럼 스며들어 예고 없이 닥쳤다.
천무괴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 이름을 기억하는 자가 아직 남아있었다니... 실로 유감스럽군."
목소리는 한없이 나직했지만, 그 안에 담긴 차가운 살의는 뼛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단청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저 사내의 검이 목줄을 노릴 것이었다. 그 순간, 단청의 머릿속에는 과거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수년 전, 한밤중의 산속에서 벌어진 전투. 어둠 속에서 한 줄기 섬광처럼 나타났던 천무괴는 그날 밤 무림맹의 장로 둘을 단숨에 베어 버렸다. 그의 검은 소리 없이 움직였고, 그날의 싸움은 무림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다. 살아남은 자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사천이 먼저 검을 비틀었다.
"천무괴, 흑혈문이 널 다시 불러낸 이유가 무엇이냐? 우리가 태을진인의 목을 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천무괴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너희가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상관없다. 내게는 오직 명령만이 중요하다. 태을진인의 목숨은 내 손으로 거둬야 하니까."
그가 손을 뻗자, 검은 칼날이 달빛 아래 드러났다. 그 검은 독을 머금은 듯 검붉게 빛났다. 단청은 눈을 좁히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적은 둘이지만, 눈앞의 천무괴는 사천과는 차원이 달랐다.
"너희가 무엇을 꾸미든, 오늘 이 자리에서 끝내주마."
단청의 검 끝에서 서늘한 기운이 일렁였다. 천무괴의 눈매가 살짝 좁혀졌고, 사천은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검을 들어 올렸다.
달빛 아래 세 사람의 그림자가 어둠에 섞였다. 한 치의 움직임에도 피가 튀고 목숨이 오가는 싸움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