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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지숙 Sep 28. 2023

정신이 혼몽한 가운데 천국의 문이 보이고

2023년 4월29일

팀원 중 체코 현지 정보에 밝힌 모씨가 '천국의 문'이라는 곳에 대해 이야기해 줬다. 정식 이름은 프라프치츠카 브라바. 보헤미안 스위스국립공원(체스케 슈비차르스코 국립공원) 내에 위치하고 있다고 정보를 준다.

프라하에 여행온 사람들 가운데 이 천국의 문을 보기 위해 데친을 찾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데친이 목적이 아니라 천국의 문으로 가는 대중교통이 데친 중앙역 앞을 지나기 때문이다. 매시 10~15분 434, 438번 버스를 타고 가면 20분 정도 걸린다. 혹시 갈 생각 있는 분들, 데친중앙역 앞에 버스정류장이 여러 개 있으니 헷갈리지 마시고 넘버2번 정류장을 찾아서 타시길.

오늘 출정은 나와 H 두 명. 11시 15분에 도착한 438번 차에 올라타니 기사분이 돈통 앞에 지도를 그린 판때기를 놓고 큼직하게 써놓은 '흐르젠스코'를 짚어보였다. 기사가 물을 정도면 보나마나 천국의 문이 있는 마을정류소겠지, 싶어 오케이라고 했다. 차비는 36코루나. 우리돈으로 2100원쯤이니 버스비는 비슷한 듯.

버스는 엘베강 다리를 건너고 개울을 따라 달리다가 흐르젠스코에서 우리를 내려주었다. 먼저 내린 내가 두리번거리자 기사분이 천국의 문으로 올라가는 방향을 가리켰다. 땡큐, 아저씨.

어제 프라하성 오를 때 파카(여기는 4월말인데도 파카 입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 낮에는 따뜻해도 아침저녁으로 파카를 입어야 할 만큼 기온이 내려간다)를 입고 가서 땀 흘리며 고생했던 터라 오늘은 아주 얇게 입고 티 하나를 돌돌 말아 가방에 넣었다. 들머리에서 몸도 마음도 가볍게 출발, 천국의 문을 향해 걸음을 뗐다. 땀이 나지 않을 정도의 속도로 끝까지 쉬지 않고 50분쯤 오르니 정신이 혼몽한 가운데 천국의 문이 보였다.

사진으로 보았을 때는 엄청나게 큰 바위에 뚫린 큰 구멍 같았는데, 직접 본 천국의 문은 하나의 거대한 달이었다. 하늘에 걸린 달이 지상으로 천천히 하강하다가 마음을 바꾸어 산 정상에서 공중부양하듯 멈추어버린 것 같았다. 

달이 왜 그랬는지도 문득 알 것 같았다. 결정적인 순간의 선택이 아닌 변심은 유죄가 아닐 거라는....

그리하여 이국의 땅, 체코의 산 정상에서 만난 천국의 문은 내게 '세계에 대한 무죄선언'이라는 선언을 스스로에게 지르게 만들었으니, 기꺼이 받아안았다.

멀찍이서 천국의 문을 마주한 순간의 경이도 컸지만, 그 전에 나는 꼭대기까지 오르는 길이 너무나 좋았다. 유럽에서도 가장 큰 사암 협곡이라더니, 나선형으로 난 코스를 따라 오르면서 올려다보는 바위절벽이 주는 장엄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멋있었고, 내려다보이는 계곡도 천연자연의 풍광을 아낌없이 선보였다. 거기다 불에 탄 채 굳건하게 선 마른 나무들과 이끼 낀 바위들이 전하는 생명력에서 느껴지는 감동 또한 적지 않았다. 

동굴을 지나 천국의 문을 통과하기 위한 노잣돈 같은 50코루나(3000원)를 치르고 정상에 섰다. 공중부양한 달을 그네 타듯 걸치고 서서 저 아래 사방을 내려다봤는데 안개 낀 절경은 말을 잃게 했다. 휴대폰이 담을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뿐. 나는 흩뿌리는 비를 맞으며 풍경 속에 오래 잠겨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커피와 차, 식사를 파는 매점에 줄을 서서 기다려 따뜻한 커피 한잔을 사서 마시고, H가 갖고온 포도를 먹고 하산했다. 추위 때문에 오래 있다간 다시 감기에 걸릴 것 같았다. 올라갈 땐 속도조절하며 천천히 올랐으나 내려올 땐 바람처럼 재빠르게 내려와 물레방아 도는 식당에서 꼴레뇨로 점심을 먹고 엄청난 수다를 떨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온 시각은 16시 45분. 숙소로 돌아오기 전에 빌라(내일 휴일이라 문을 닫는)에 가서 내일까지 먹을 장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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