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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정해경 Aug 07. 2023

[몰타어학연수] 68세도 어학연수를 하나요?

몰타어학연수 제2장 #14 내 나이가 어때서, 68세의 어학연수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제2장 프리인터미디어트 몰타  

#14  내 나이가 어때서, 68세의 어학연수 


한국에서도 요즘은 50대 이상이 나이대의 어학연수가 관심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데요. 하지만 어학연수에서 '나이'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고정관념인 것 같기는 해요. 제가 어학연수를 결정했을 때도 주위에서는 '50대에 무슨 어학연수냐'는 소리를 엄청 들었거든요. 외국은 어떠냐면요? 50대는 애기더라고요. 


5월 중순이 되면서 몰타는 갑자기 여름이 찾아왔다. 이 말은 어학원에 학생들이 폭발적으로 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어학원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는 대부분 라틴 아메리카였는데 여름이 되면서 유럽에서 어학연수를 오는 비중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확실히, 몰타는 여름을 위한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대부분의 관광수요가 여름 한 철에 몰리는 관계로 여름 시즌에는 어디랄 것 없이 날마다 축제가 펼쳐지고, 온 나라가 마치 해운대 해변인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바다만 있으면 사람들은 풍덩풍덩 뛰어들고 수영복 패션이 다반사다. 



나의 어학연수도 어느덧 10주 차로 접어들었다.  5월 둘째 주가 되면서 가깝게 지내던 친구들이 하나둘씩 고국으로 돌아가는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한 반의 정원은 대략 12명 정도로 정해져 있는데 어학연수가 끝나거나, 레벨업을 하거나, 다른 반으로 가는 등 빠지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반에는 2주 연속으로 새로 오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평소에 수업시간보다 항상 조금 일찍 가는 편이고 늘 내가 앉는 고정자리에 앉는다. 그러다 어느 월요일은 평소와 달리 수업 시간에 거의 딱 맞춰서 들어가게 됐다. 내 자리에는 다른 사람이 앉았고 구석 자리에 빈 의자 하나만 남아 있었고 옆 자리에는 처음 보는 얼굴이 앉아 있었다. 그날 우리 반에 모처럼 새로운 학생이 한 명 왔고 나와 파트너가 됐다. 


그의 이름은 '나센'이고  아저씨는 이란 태생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자랐고 현재는 오스트리아 국적으로 비엔나에 살고 있다고 했다. 태어난 나라와 사는 나라가 다르고 국적도 다른 삶이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에는 너무 신기했다. 하지만 외국에서 만난 친구들 중 상당수는 출생지와 사는 곳이 다른 사람이 많고 국적에 크게 개의치 않기에 유럽 대륙 전체가 한 나라는 느낌을 받기도 했었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크루즈 여행으로 중국을 여행했던 적이 있는데 그때 잠시 인천을 들렀던 경험이 있다며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그렇게 잠깐의 스몰토크 후 본격적으로 수없이 시작됐는데.... 

나센 아저씨는 선생님이 설명하는 내용을 하나도 못 알아듣는 눈치였고 지금 뭘 배우고 있는지,  어떤 걸 해야 하는지 도저히 감을 못 잡고 있었다. 분명 레벨테스트를 봤고 결과에 따라 이 반에 배정이 됐을 텐데 초급인 엘리멘터리로 반을 다운해서 내려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 정도로 총제적 난국이었다. 


파트너가 나보다 말을 잘하는 사람이면 영어 실력도 덩달아 올라가는 경향이 있고 나보다 영어를 못하는 사람이면 그 수준에 맞춰서 말을 해야 하다 보니 대체로는 나보다 실력이 좋은 사람과 파트너를 하고 싶어 한다. 영어가 정체기라 조금씩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는데 파트너가 하나도 모르고 헤매고 있으니 내 수업이 온전할 리는 만무했다. 결국,  지금은 뭘 배우고 있는지, 선생님이 설명하는 내용을 아저씨가 알 수 있도록 다시 설명해줘야 했고 문법 문제를 풀 때는 개인과외하듯 하나하나 다 설명을 해줘야 했다. 그렇게 첫날 수업을 마치고 나니


"내가 너무 몰라서 미안해. 집에 가서 공부를 해오겠다."며 나센 아저씨는 시커먼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내일 배우는 부분에 대해서 체크를 해주고 공부해야 하는 부분을 알려주니 고맙다며 집으로 가셨다. 


첫날은 언제나 멘붕이다. 어학연수 첫 날도 그렇고, 레벨업을 해서 새로운 반으로 올라가도 그건 똑같다. 수업이 진행되고 있는 중간에 들어가는 상황이니 반 친구들은 적어도 나보다는 일주일 혹은 그 이상 수업이 진행됐고 적응이 된 상태니 내가 그 반에서는 영어를 제일 못한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어학연수의 첫날은 모든 것에 새로운 1일 차니  더 멘붕일 수밖에 없다. 


아저씨는 아저씨고 나는 수업을 마치고 나니 다른 날 보다 녹초가 됐다. 내일은 일찍 와서 원래 내 자리에 앉아야겠다고 결심을 하면서도 아저씨가 어쩌면 내일 엘레멘터리로 반을 옮긴다고 하지는 않을까 싶었다. 

나의 장난스러움에도 사람 좋은 웃음으로 다 받아주던 68세 나센 아저씨 


다음 날,  우연찮게도 아저씨와 나는 또 파트너가 됐다. 어제 멘붕의 좌절모드였던 아저씨는 온데간데없고 수업시간에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옆에 끼고 그때그때마다 사전을 찾아보거나 아니면 나에게 물어보는 등 적극적으로 수업에 임했다.  아저씨와는 매일 파트너를 하지는 않았지만 자주자주 파트너가 되긴 했다. 


처음에 말을 제대로 못 해서 버벅거리던 아저씨는 어느 순간이 되니 영어로 의사표현을 하기 시작했고 수업시간에 내가 따로 설명을 해줄 필요가 없을 정도가 됐다.  영어 실력이 수직 상승하는 것을 내가 느껴질 정도였다. 문법 문제의 경우 선생님이 문제를 풀고 나면 파트너끼리 답을 맞혀보라고 할 때까지도 문제를 못 풀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랬던 아저씨가 언젠가부터 나한테 다 풀었냐며 먼저 답을 맞혀보자고 할 정도였다. 


어느 날, 저녁에 산책을 하던 중에 우리 동네 노천카페에서 아저씨가 혼자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나센~ 여기 웬일이에요?" 

"홈스테이 저녁 식사 시간까지 시간이 남아서 수영하고 지금은 좀 쉬고 있어. 너도 맥주 한잔 할래?" 


아저씨는 홈스테이를 하고 있는데 통상 홈스테이는 저녁이 제공되지만 몰타에서는 홈스테이를 잘 선택하지는 않는다. 어학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가 가격이 상대적으로 비싼 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50대 이상 남자의 경우 혼자 어학연수를 오면 아무래도 밥이 문제니 홈스테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 어제 한국 드라마도 보고 한국 뉴스 봤어." 

"뭐라고요? 외국에서는 한국 ON-air가 안 돼서 저도 못 보는 드라마와 뉴스를 어떻게 보셨대요?" 

"다 방법이 있어. 자~ 봐봐 한국 방송 있지?" 


kbs, mbc, sbs에 EBS까지 다 있는 것이 아닌가. 역시 건축가이자 엔지니어였던 아저씨다운 솜씨였다. 


"영어가 나와요?" 

"아니, 한국어만 나와" 

"내용 모르는데 괜찮아요?" 

"그냥 보는데 재밌어. 너 때문에 한국에 관심이 많이 생겼어." 

"한국 드라마에 빠지면 헤어 나오기 힘들 거예요. 하하." 

한국에서 방영되는 채널을 찾아서 보기 시작했다는 나셀 아저씨 


어영부영 시간은 흘렀고 나센 아저씨가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야 하는 4주 차가 됐다.  아저씨와 페어웰을 하기로 했지만 친한 친구들이 금요일 밖에 시간이 안 된다고 했다. 그래서 금요일에 다 같이 만나기로 했고 그전에 아저씨와 나는 어쩌다 보니 목요일부터 페어웰을 하게 됐다. 이틀 동안 연속으로 아저씨가 자주 가던 곳을 함께 다니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참 많이 하게 됐다. 


학교 뒤에 있는 세인트조지 베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나이 이야기가 나왔는데 아저씨 나이가 68세였다. 나는 58세로 알고 있었는데  68였던 것!!

58세도 놀랍다고 생각했는데 68세라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내 나이가 어때서'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잠시 있으니 주문을 받으러 왔는데 주인아저씨와 세상 친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아닌가.  아는 사람이냐고 물었더니 자주 와서 친해졌다고 했다. 잠시 후 종업원이 커피를 가져다 주니 아저씨는 대뜸 종업원에게 말을 걸며 이런저런 스몰토크를 자연스럽게 이어나갔다.  어학원 첫날 아무것도 모르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내가 일일이 설명해 준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는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솔직히 깜짝 놀랐다. 


아저씨의 실력이 일취월장한 것은 오스트리아가 독어를 사용하는데 독일어와 영어는 한국어와 일본어 같은 언어라서 저 연세에도 쉽게 영어를 배울 수 있구나 정도로만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이틀 내내 아저씨랑 다니다 보니 아저씨 영어 실력이 급상승한 것은 단순히 독일어를 구사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게 아니었다. 


어학연수 4주 동안 계속 이렇게 사람들과 대화를 했냐고 하니 거의 그랬다고 한다. 수업 마치고 나면 저녁에 집에 갈 때까지 커피 한 잔, 맥주 한 병 등등 두어 군데 카페 들어고 해변에서 매일 수영하고 멍 때리고 그러면서 사람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계속 나누면서 시간을 보냈다고 했다. 


나의 경우는 프리인터미디어트로 올라오고 나니 어휘가 부족한 게 급선무였다. 친구들이 계속 수업 끝나고 어울리자고도 했고 일전 남부투어를 함께 다녀온 독일인 친구들도 학원에서 마주칠 때마다 밥 먹자, 커피 마시자 했지만 부족한 어휘 해결이 먼저다 싶어 수업 끝나고 하루에 3~4시간 정도는 책상에 앉아서 공부를 했었다. 하지만 죽자고 외운 단어와 문장은 20%나 기억이 날까 말까 한 상태인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수업시간 외에 영어로 도통 말을 안 하고 있으니 스피킹이 확 줄었다는 게 스스로도 느껴지니 너무 스트레스였다. 


4주 후 정반대의 입장이 돼 버린 나와 아저씨였다. 


아저씨는 이런 내게 "몰타 날씨가 이렇게 좋은데 왜 집에만 있는 거냐? 언어는 그렇게 해서 늘지 않는다. 밖에 나가 놀기도 하고 몰타의 자연을 만끽하는 게 더 중요해. 그저 이 시간을 즐기고 몸과 마음을 릴랙스해. 언어를 배울 때는 무조건 즐거워야 해." 라며 강조를 했다. 


엄마가 이란인이라 아저씨는 페르시아어와 독일어 2개 국어를 구사하는데 여기에 영어까지 배우게 된 상황이니 언어를 어떤 식으로 습득해야 하는지 오늘 상황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건축가로 그간 100여 개국이 좀 넘는 나라를 여행한 나센 아저씨가 가진 풍부한 경험치와 통찰력은 아저씨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책으로 배운 얄팍한 지식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세월이 아저씨의 얼굴에 훈장처럼 새겨져 있었다.  68세라는 나이는 그냥 주어지는 숫자가 아니었다. 어쩌면, '나이'라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가 숫자 안에 나를 가두고 놓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어는 몸으로 부딪치는 언어라는 걸 직접 보여준 나센 아저씨 


아저씨와 내가 나누는 이야기는 그칠 줄을 몰랐다.  금요일에 가장 친한 친구인 이본과 디아나와 다 같이 모여 또 한 번의 페어웰을 했다. 페어웰이라고 하지만 거창할 것 없이 함께 밥 먹고 차 마시고 수다 떨면서 그간 함께 보낸 시간을 마무리하는 자리라고나 할까.  다 같이 밥 먹고 수업에 맞춰 학원을 가면서도  나센 아저씨는 4주간의 짧은 어학연수가 아쉬운 듯 주요 포인트마다 멈춰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아저씨는 오스트리아에 돌아가서도 영어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하셨다. 지금 사용하고 있는 교재를 이용하고 싶다고 하면서 교재에 답이 없으니 수업시간에 교재 문제를 풀고 나면 답을 자신에게 좀 보내달라고 하였다. 물론이지요.  내친김에 스피킹 오디오 다운로드하는 방법을 알려주니 아이처럼 좋아라 하신다. 나센 아저씨가 비엔나로 떠나면서 부인과 딸에게도 이미 내 얘기를 다 해놓았으니 시간 되면 언제든 비엔나로 놀러 오라고 하면서 연락처를 주고 가셨다. 


나센 아저씨 덕분에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한 이틀이었다. 영어가 생각보다 늘지 않는 것 같아 슬슬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 마음이 많이 복잡했는데 나센 아저씨 덕분에 다시 힘을 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다들 '영어'라는 같은 목표가 있어서인지 이들과 나누는 '동병상련'은 타국에서 큰 힘이 되었다. 

사진으로 남겨진 나센 아저씨와 우리의 시간.  


덧. 50세에도 '그 나이에 영어는 배워서 뭐 하냐'를 귀가 아프도록 들었던 한국이었는데 한국에서 살아가는 68세가 어학연수를 한다면 뭐라고 할지 너무 상상이 됐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에 점점 힘이 실리고 있다고 해도 '나이'가 가로막고 있는 장벽은 어쩌면 내 안에 더 크게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한 달 살기만으로는 도저히 경험할 수 없는 것들을 느낄 수 있는 어학연수다. 여러분들도 한번 도전해 보시길. 


+ 다음 이야기 :  몰타의 핫한 여름 여행지, 세인트피터 풀(St. Peter's Pool)



'50대에 어학연수는 핑계고' 1장은 매거진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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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사진 정해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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