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인 발레타에서 꼭 한 곳만 가야 한다면, '성요한대성당'이라고 하나같이 말을 합니다. 그만큼 성요한 대성당이 중요하다는 의미일 텐데 의아했던 것은 대부분의 관람객들은 성요한대성당보다 성당 안에 전시되어 있는 카라바조의 그림을 보기 위해 성당을 찾는다는 사실이죠. 저 역시 카라바조 그림을 보겠다는 생각으로 기대 없이 들어선 성당이 감탄으로 바뀌는 데는 1초면 충분했습니다.
+ 첫 인상은 실망입니다.
성요한 대성당은 한 해외매체에서 Travlers' Choice 2022 Best of the Best라는 제목으로 ‘넋이 나갈 정도로 아름다운 세계의 성당 21’에 선정했다. 또한, 영국 역사 유산의 권위자인 작가 리처드 카벤디쉬(Richard Cavendish)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에서도 성요한 대성당을 적극 추천하고 있었다. 도대체 성요한 대성당이 어느 정도이길래 이런 찬사를 받고 있는 것일지 궁금했다.
성요한대성당은 '발레타의 심장'이라고 불린다. 우리 몸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심장'에 성요한성당을 빗대었을 때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우선, 바둑판으로 설계된 발레타에서 가장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데 성요한대성당을 중심으로 발레타라는 도시가 건설됐다고 보면 된다. 또한, 성요한기사단의 역사가 곧 몰타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성요한대성당은 눈으로 읽는 한 권의 몰타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몰타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곳라면 바로 이곳. 성요한대성당일 수밖에 없다.
몰타에서 가장 유명한 랜드마크인 성요한대성당에 서면 첫인상은 '다소 실망'이다. '발레타의 심장'이자 '몰타 최고의 랜드마크'라는 수식어라면 엄청 화려한 외관을 기대하기 마련인데 너무나도 평범했다. 참고로 이 성당이 지어질 당시 심플함을 추구했던 매너리즘 양식이 유행이었다고 한다. 성요한대성당 정면은 대부분의 유럽성당이 화려하게 정면을 장식한 파사드는 찾아볼 수 없다. 가장 눈에 띄는 건 시간, 요일, 월을 한꺼번에 알 수 있는 3개의 시계와 다른 성당에서 보지 못했던 발코니다. 이 발코니에서는 성요한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트(수장)가 다음 수장을 발표하는 장소로 수장발표 후에는 광장에 모인 대중들을 향해 금동전을 뿌렸다고 한다.
심플한 성요한 대성당과 현재의 시간, 날짜, 월을 나타내는 세 개의 시계
성당관람의 경우 측면에 티켓 구매부스에서 티켓을 구입한 후 입장을 하게 된다. (성요한 대성당 입장료는 15유로) 성당의 정면 출입구는 미사 때만 출입이 가능한데 이때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미사 때 성당을 들어가 볼 수 있으니 비싼 입장료를 내고 굳이 성당을 볼 필요가 있나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미사 후에 성당 관람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무엇보다 카라바조 그림이 있는 오라토리룸은 개방하지 않는다.
출입구에는 가리개에 끝이 8개로 갈라진 십자가가 있는데 성요한기사단의 십자가다. 몰타에서는 몰타 국기보다 더 흔한 것이 성요한 기사단의 십자가다. 꼭짓점이 8개가 있는 기사단의 십자가는 기사단을 구성하는 8개의 출신지역(아라곤, 카스티야, 오베르뉴, 바이에른, 포르투갈, 영국, 이탈리아, 프로방스)을 의미한다라고도 하고 기사단이 가져야 하는 8개의 의무라고도 한다. 8개 지역을 나타낸다고 봐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기사단의 영어 명칭은 'The Knight of St John' 혹은 'Order of Malta'로도 쓰고 성요한기사단 혹은 몰타기사단이라고 부르는 등 다양한데 이 글에서는 '성요한기사단'이라고 쓰겠다.
성당 관람을 위해서는 측면에 있는 티켓부스에 티켓을 구입해야 한다.
성요한 대성당의 일요일 오전 미사 때는 입장료를 받지 않지만 중앙 제단 외 다른 곳은 둘러보기는 힘들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캐럴 공연이 있었다.
외관이 너무 심플했던 탓에 애초에 성당 내부에 대한 기대는 카라바조 그림 외에는 없었다.
하지만 성당 안으로 한 걸음 들어서는 순간, 누구나 한결같은 반응이다. '와-'하는 감탄사가 부족하다 싶을 정도로 화려함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전체 벽면은 전부 금으로 번쩍번쩍하고 바닥부터 천장까지 빈 공간 하나 없을 정도로 화려하게 채우고 있으니 도대체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모를 정도다. 심플한 외관에 놀라고 화려한 실내 인테리어에 놀라게 되니 두 번이나 놀랄 수밖에. 어쩐지, 명성에 비해 너무 초라할 정도 심플하다 싶더라니.
'몰타'는 성경에도 등장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지만 실제 한 국가로 여겨진 건 기사단이 몰타를 다스리면서부터다. 성요한기사단은 1080년 성지 순례자들을 위해 예루살렘의 세례자 요한 무덤 위에 세워진 아말피 병원에서 구호기사단으로 출발했다. 제1차 십자군 원정으로 예루살렘을 정복하면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군사적인 성격을 띠면서 성지와 순례자를 보호하기 위한 조직으로 발전했다. 이후 예루살렘이 이슬람에 정복당하자 로도스 섬으로 근거지를 옮겼지만 계속된 이슬람의 침략으로 결국 6개월 만에 로도스를 떠나 몰타에 정착을 하게 된다. 이때 지중해를 다스리고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에게 매년 매 2마리를 바치는 조건으로 몰타를 이양받았고 이후 성요한 기사단은 약 270여 년간 몰타를 다스리게 된다. 오스만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끈 몰타 공방전 이후 유럽에서 성요한기사단은 영웅으로 떠올랐다. 도시를 재정비하면서 발레타에 세례자 요한을 위한 성당을 헌정하게 되는데 바로 이곳, 성요한 대성당(St. John co-Cathedral)이다.
성요한기사단은 나폴레옹이 이집트 원정당시 몰타를 점령한 후 기사단이 몰타를 떠나게 됐고 몰타기사단의 '국가 지위'도 상실하게 된다. 하지만, 실질적 지배적 영토가 없음에도 성요한기사단은 지금도 상징적인 의미의 국가로 인정을 받고 있으며 로마에 거점을 두고 있다. 유럽 100여 개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으며 기사단 여권도 사용이 가능하다. 성요한기사단을 여전히 유럽의 국가로 인정하고 있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오스만을 막아낸 공로를 뼛속까지 인정해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짐작해 본다.
참고로 우리나라에도 성요한기사단 한국 지부가 있으며 기사단장으로 두산그룹의 전 회장인 박용만 씨다. 교황청에서 열린 성요한 기사단 소집당시에 한국기사단 단장으로 참석해 교황을 알현했다. 알게 모르게 몰타와 우리나라의 인연이 곳곳에도 스며있다.
메인 제단에서 양옆으로 아치형으로 된 8개의 공간이 있는데 8개 지역 출신 기사단이 꾸민 제단이 있다. k
심플한 외관과 달리 엄청나게 화려한 내부
너무 화려한 대성당에서 어느 곳부터 봐야 할지 고민이라면 먼저 내부계단을 따라 성당의 2층으로 올라가 보자. 성당의 2층으로 올라가면 1층에서 봤던 모습과는 또 다른 화려함이 기다리고 있다. 천장은 세례자 요한에게 봉헌된 성당인 만큼 세례자 요한의 일대기가 채우고 있다. 그림에 문외한이라고 하더라도 굉장히 생생하다는 느낌을 받는데 오스만을 무찌른 흔적들이 곳곳에 티 나게 그려 넣은 점이 굉장히 특이했다.
1층에 있을 때는 대리석 바닥이 어떤 모양인지 몰랐는데 2층에서 보니 전체가 바둑판으로 구획되어 있는 것이 잘 보였다. 성당 바닥은 성요한 기사단이 묻혀 있는데 성요한대성당 홈페이지에는 어느 부분에 누가 묻혀있는지 안내를 하고 있다. 기사단은 아니지만 성요한대성당을 지은 사람도, 세계 2차 대전 때 성당의 모든 자료를 지켜낸 사람도 공로를 인정해 이곳에 함께 묻혀 있다.
2층에서 내려다본 성당의 내부
천장화를 그린 사람은 마티아 프리티(Mathiae Preti)라는 이탈리아 화가로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린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같은 방식인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렸다고 하는데 무려 6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발코니에서 그려나가기 시작한 천장화는 세례자 요한의 탄생으로 출발해 맨 마지막 부분인 제단 앞에는 세례자 요한의 참수로 끝이 난다. 카라바조가 그린 '세레자 요한의 참수'와 마티아 프리티가 그린 세례자 요한의 참수가 어떻게 다른지 비교를 해본다는 게 볼거리가 워낙 많다 보니 까맣게 잊어버리고 나중에 생각이 나서 좀 아쉬웠다.
세례자 요한의 탄생부터 죽음까지 세례자 요한의 일대기를 그린 천장화의 가장 첫 장면 꽤 인상적이었다. 오스만을 나타내는 터번을 쓴 사람을 밟고 성요한 기사단의 깃발을 높이 쳐든 미네르바 여전사가 당당하게 정중에 서 있다. 왼쪽 아래는 성요한기사단 십자가가 가슴에 새겨진 검정 옷을 입고 침상에 누워 환자를 돌보는 모습인데 성요한 기사단이 어떤 성격인지를 보여준다. 다소 생뚱맞은 느낌의 두 사람이 양쪽 구석에 배치되어 있는데 이 그림을 의뢰할 당시 스페인 출신으로 수장이던 라파엘 코트너(Raphael Cotoner, 1660-1663)와 니콜라스 코트너(Nicolas Cotoner ,1663-1680)다.
발코니 쪽 바로 옆에 그려진 그림은 프레임 밖으로 그림자가 나와있는데 양쪽 모두 그림자가 있다. 어, 좀 이상한데. 한쪽 방향에서 빛이 들어오면 양쪽으로 그림자가 생길 리가 없으니 그림자가 틀린 그림인데 그걸 바로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성요한대성당의 실내는 조명이 없다면 다소 어두운 편이고 천장은 밋밋하다. 하지만 그림의 특정 부분에 그림자를 의도적으로 이런 식으로 그려 놓았기에 입체감과 공간감을 살려내고 있었다. 시스타나 대성당의 천장화를 그린 미켈란젤로와 비교할 수는 없다 해도 마티아 프리티가 그린 성요한대성당의 천장화 역시 볼 만한 가치가 중분 했다. 성당 안에 묻혀 있는 마티아 프레티의 무덤만은 밟지 못하게 해 둔 이유가 있었구나.
천장화의 가장 첫 장면은 성요한 기사단이 존재하는 이유를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다.
성당 안에 햇빛이 많이 들어오지 않는데도 의도적으로 그림자를 프레임 밖으로 그려 넣어 입체감과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성당 내부에서 유일하게 밟을 수 없도록 해둔 곳은 '마티아 프리티'의 묘다
+ 왜 카라바조 그림만 보는 거죠?
이제 1층으로 내려가 성당 내부를 둘러볼 차례다. 다양한 부조와 조각으로 가득 메운 공간은 화려함의 극치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따로따로 조각을 해 붙인 것이 아니라 벽 하나를 통째로 깎아 조각한 다음 그 이후에 도금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감탄을 넘어 경이롭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성요한대성당의 내부가 처음부터 이렇게 화려했던 것은 아니었다.라파엘 코트너와 니콜라스 코트너가 수장일 때 실내 인테리어가 지금처럼 화려하게 바뀌었다. 몰타 건축가 제롤라모 카사르(Gerolamo Cassar)에 의해 지어진 성요한대성당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사이의 짧게 있었던 매너리즘 양식으로 안팎모두 아주 심플한 성당이었다. 생각해 보면 1565년에 오스만의 침공을 막아낸 몰타였고(몰타 대공방전) 이 전쟁의 승리가 해전사에 길이 남을 레판토해전의 성공으로 이어지면서 오스만의 세력이 영원히 지중해를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아낸 성요한기사단이니 그 자부심은 최고조였을 것이고 한동안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성당에 비해 너무 심플한 자신들의 성당이 성에 찰리가 만무했다.
1660년에 수장이 된 라파엘 코트너와 그 뒤를 이은 니콜라스 코트너에 의해 실내 인테리어를 바꾸게 되는데 교회를 다시 지을 수는 없어서 선택한 대안이었다. 성요한대성당 공사 당시에는 매너리즘 양식이었는데 이제 시대는 바로크 양식으로 넘어왔다. 따라서 성요한대성당의 내부는 바로크 양식으로 금박을 입힌 나뭇잎과 정교한 대리석 기념물의 정교한 모티프로 벽을 조각해 화려하게 꾸몄다.
벽면 중에 같은 모양의 패턴이 반복되는 곳이 2군데 유독 눈에 띄었다. 영어 단어 두 글자 RC와 NC가 벽지 패턴처럼 새겨져 있었다. 다들 이미 눈치챘겠지만라파엘 코트너의 영문이니셜 RC와 니콜라스 코트너의 약자 NC다. 말하자면 이 성당을 내가 만들었다는 증표 같은 것이다. 수많은 기사단의 이름 중 성당 안에 새겨 넣은 두 사람의 이름은 그렇게 영원히 남았다.
벽 하나를 통째로 깎아 금박을 입힌 나뭇잎과 화려한 대리석 바닥은 바로크 예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라파엘 코트너의 영문이니셜 RC와 니콜라스 코트너의 약자 NC로만 벽을 꾸몄다.
성당 메인 제단을 제외하고 양쪽으로 4개의 아치가 늘어서 있는 공간은 성요한기사단의 8개 지역에 할애된 예배당이다.메인 제단에서 가장 가까운 좌우로 이탈리아 기사단과 프랑스 기사단의 예배당이 자리를 잡았는데 8개 기사단 중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기사단이었던 만큼 성당 안에서도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각 지역 기사단에 할애된 공간인만큼 제단화는 각 기사단들의 수호성인을 그렸다. 또, 수장 출신 지역의 역사, 문화와 함께 수장이 몰타에서 남긴 업적들도 조각, 부조, 동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꾸며져 있었다.어쩌면 각 기사단의 자존심이 걸린 공간이었으니 8개 작은 예배당은 국가대항전 못지않은 화려함으로 눈을 사로잡는다.
공간도 공간이지만 각 공간의 수장들이 몰타에서 이룬 업적을 표현해 놓은 것을 보면 어떤 식으로든 오스만을 이긴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오스만 병사로 추정되는 사람이 건물을 떠받치고 있다던지, 오스만의 목을 밟고 있다던지, 몰타공방전의 전투 장면을 남긴다던지 등등. 몰타가 오스만을 막아낸 것에 대한 자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되는 한편, 유럽에서 오스만을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작은 예배당 8개는 성요한 기사단을 이루고 있는 8개 지역에서 꾸몄다.
메인제단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 받는 예수님의 모습이고 그 앞의 모티브에는 최후의 만찬이 조각되어 있다.
메인 제단 바로 옆에는 필레르모 성모마리아를 위해서 헌정된 예배당이 있고 바로 옆으로 지하로 이어지는 공간이 있어 내려가 보았다. 발레타를 만든 파리소 드 라 발레트를 비롯해 성요한기사단 그랜드 마스터(수장) 12명의 무덤이 메인 제단 바로 아래 위치하고 있으니 성요한 성당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성요한기사단 홈페이지를 살펴보니 벽면에 대놓고 자신의 이니셜을 새겨 넣은 두 수장, 라파엘 코트너와 니콜라스 코트너는 이곳에 없고 각각 자신들의 작은 예배당 아래에 묻혀 있었다.
메인 제단 바로 아래 지하공간에는 성요한기사단의 그랜드마스터 중 가장 중요한 12명의 묘가 있다.
+ 예술적 가치만 보라, 카라바조
얼추 성당도 웬만큼 봤으니 이젠 진짜 성당에 온 목적, 카라바조 그림을 보러 갈 차례다. 카라바조 그림이 있는 곳은 오라토리룸으로 성당 정면 출입구로 들어오면 바로 오른편에 있다. 오라토리룸은 기사단의 신입생을 교육하는 곳인데 오라토리움으로 들어가니 성당에 딸린 작은 내부 공간이었다. 이곳에서는 아주 특별한 행사로 드물지만 연주회를 열리고 하는 곳이다.
조금은 어두운 실내공간을 조심스레 걸어 들어가니 정면에 큰 그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어두운 연극 무대의 핀 조명이 오직 주인공에만 오직 초점을 맞추듯 주인공에게만 시선이 향한다. 직전에 벌어진 참수현장인 양 그림이 아니라 마치 실사현장을 보고 있는 듯 너무도 생생해 소름이 돋았다. 바로크 회화의 문을 연 카라바조의 그림 '세례자 요한의 참수'다.미술사에서도 큰 획을 남긴 그림이기에 책에서 본 적은 있었지만 책에서 인쇄물로 보던 그림과 실제 작품의 간격은 어마어마했다. 필시 사진으로 직접 본 느낌은 100% 전달이 안 될 것이다. 모든 그림이 다 그렇지만 특히 카라바조의 그림은 직접 보지 않으면 도저히 느낄 수 없다. 빛의 마술이라고 불리는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보다 더한 마술을 부리는 카라바조의 '빛'은 너무나도 강렬했다.
오리토리룸 정면에 걸려 있는 카라바조의 그림
카라바조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고 해도 괜찮다. 카라바조의 일대기 다룬 약 10분 정도의 다큐멘터리가 상영되고 있는데 그것만 보더라도 카라바조가 어떤 인물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가 있다. 카라바조는 로마에서 살인을 저지른 후 몰타에서 '세례자 요한의 참수'를 그린 후 다시 명성을 회복하는 듯했으나 제 버릇 남 못준다고 몰타에서도 사소한 시비 끝에 제 성질을 못 이기고 다시 살인을 저질렀고 감옥에 갇히게 된다. 참수형 당할 운명이었지만 탈옥 후 로마로 되돌아가다가 말라리아에 걸려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사람만 놓고 보자면 살인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지금으로 치자면 반인격성장애의 개망나니로 봐도 좋을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남겨 놓은 위대한 작품들을 보고 있자면 그의 그림에 스며들어 있는 '처연함'은 불운한 삶과 바꾼 위대한 예술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인간성과 예술작품이 결코 같지 않음은 카라바조도 예외는 아니다.
카라바조가 그린 많은 작품들은 로마, 피렌체, 런던 등에도 있는데 성요한대성당에 걸린 '세례자 요한의 참수'는 왜 더 특별한 취급을 받는지 궁금했었다. 이 그림은 카라바조가 남긴 그림 중 가장 큰 사이즈의 그림인데 역작도 역작이지만 카라바조의 사인이 있는 유일한, 단 한 점이기 때문이다. 당시에 화가는 그림에 사인을 남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이 작품으로 로마에서 저지른 살인죄를 사면 받을 목적이었고 그 어떤 때보다 절박했다. 다른 작품보다 더 혼신의 힘을 기울여 그림을 그려냈고 이 그림은 내가 그렸다는 것을 꼭 표시해야 했었다. 사인은 나중에 훼손된 그림을 복원하면서 밝혀지게 됐다. 카라바조는 몰타에서 총 6점의 작품을 그렸는데 '세례자 요한의 참수'와 '저술하는 성제롬' 두 작품만이 성요한대성당에 남아 있다.
고흐처럼 살아생전에는 카라바조도 인정을 받지 못했는데 살인자이면서 성격파탄에 가까웠던 그의 생도 한몫을 했다. 정식으로 그림을 배운 시간도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그가 가진 천재성으로 남겨놓은 그림들은 한동안 잊혔다가 20세기가 되어서야 다시 빛을 보게 된다. 카라바조의 화풍이 한 시대를 마감하고 바로크라는 새로운 사조를 열었던 화가로 평가받게 되니카라바조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어찌 보면 매 순간이 극적인 삶이구나 싶다. 오라토리룸이 간혹 공사를 할 때가 있는데 그때는 성당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고 하니 성요한 대성당에서 카라바조 그림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상초월이다. 카라바조 그림 때문에 성요한대성당을 찾는다는 이유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카라바조가 유일하게 서명을 남긴 '세례자 요한의 참수'다. 과연 서명은 어디에 남겼는지 찾아볼 것
성요한대성당에는 '세례자 요한의 참수'외에도 '저술하는 성제롬'도 함께 볼 수 있다.
성당 보수작업은 수시로 이루어진다.
성당 출입문의 오른쪽이 오라토리룸이라면 왼쪽은 성부실인데 신부님들이 미사를 드리기 전에 옷을 갈아입고 미사준비를 하는 곳이다. 현재 메인 제단에는 세레자 요한과 세례 받는 예수님의 조각상이 있는데 그 조각상이 있기 전에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는 장면이 그려진 그린 그림이 걸려 있었고 지금은 성부실에서 볼 수 있다.
성부실에는 메인 제단에 한동안 걸려있었던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게 세례를 주는 모습을 그린 그림을 볼 수 있다.
몰타에서 지내는 동안 성요한대성당 미사에 참석을 하기도 했었다. 몰타를 떠나기 전에 무늬만 천주교 신자인 나와 달리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지인을 위해 묵주를 샀고 성요한대성당 신부님께 축성을 받았는데 뭔가 조금 특별한 기분이 들었다.
신부님께 묵주 축성 받는 중
+ 성요한대성당 관람 팁
성요한대성당은 카라바조의 그림만이 전부가 아니다. 바로크 양식으로 화려한 꾸민 성당 내부는 성요한기사단의 역사고 나아가 몰타의 역사다.
워낙 볼거리가 많아 여러 언어로 설명한 수신기를 대여하고 있는데 아쉽게도 한국어 설명은 없다. 내가 몰타에 있는 동안 한국인 가이드 루피나 씨가 성요한대성당 설명을 녹음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한국어 수신기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주요 볼거리에는 영어로 설명된 안내판이 있기는 하지만 수많은 이야기가 있는 성요한대성당을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따라서 가급적이면 성요한대성당만큼은 꼭 가이드 설명을 들으라고 조언한다. 마이리얼트립에서 몰타를 검색하면 한국인 가이드 루피나 씨의 완벽한 해설을 들을 수 있다. 영어 테스트를 해보고 싶다면 영어로 설명하는 가이드도 있으니 도전해 봐도 좋겠다.
성당 관람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다르긴 해도 가이드 설명이 없다고 하더라도 최소 1시간 이상이 걸린다. 성당 관람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는 편이데 마지막 관람 시간 2시간 정도에 들어가 천천히 관람한 후 사람들이 대부분 빠져나가는 시간에 2층에서 사진을 찍으면 사람이 거의 없는 성당의 모습을 담을 수 있다.
성요한대성당이 있는 몰타의 수도인 발레타는 수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이다. 매우 작은 곳이지만 오래된 건물 하나하나 모두 스토리가 있다 보니 봐야 할 곳들이 꽤 있는데 대부분 성요한기사단과 관련된 건물이다. 이미 앞선 2개의 포스팅에서 자세하게 소개해 놨으니 같이 읽어보면 성요한기사단과 몰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