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홍천 월운리 한 남자가 나에게 물었다.
"은행나무꽃을 본 적이 있나요? " 은행나무 열매는 본 적이 있지만 꽃도 피나요?"
"그 꽃은 크기가 매우 작아서 본 사람도 많지 않아요"
" 어떤 색깔인가요?"
그 이야기를 듣고도 여태껏 은행나무꽃을 보지 못했다.
어떤 영화들은 단순히 재미를 좇는다. 또 어떤 영화들은 미학적, 삶의 메시지를 남기고 전하려 한다. 크게 나누면 세상에 존재하는 영화는 이 두 갈래뿐이었다. 그러나 내가 꾀하는 영화는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나는 영화와 아무런 연관이 없던 사람들, 그리고 마을이라는 자원을 바탕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꿈꾸었다.
재미와 메시지— 튀지 않은 일상의 재미와 그들에게서 나오는 메시지—는 로컬, 마을이라는 공간과 연결되어 작가가 아니라 그들의 몸과 삶에서 비롯된다. 그것은 오히려 너무나 당연한 탄생이었다.
하지만 시작부터 편견은 따라붙었다. "그들은 잘하지 못할 것이다, 가르쳐야 한다"는 의심의 눈초리. 교육도 없고, 전문성도 없는, 그저 시골 잔치 같은 촬영 과정.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오히려 그 '부족함' 속에서, 사람들 안에 깊이 숨어 있던 창작의 본능이 터져 나왔다.
그럼에도 그들의 시선은 늘 비뚤어져 있었다. 주민들의 연기는 창조적 발현이 아니라, 재미있는 영화의 보석(스타)을 흉내 내는 예능으로 축소되었다. 심지어 그 안에서 수석 같은 개성도, 그저 잠깐 꾸어보는 백일몽으로 소비되었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는 아래의 삶의 풍경은 산 아래에서 바라보면, 풍경과 사뭇 다른 법이다. 산 정상이 아니라 밑변이야말로 거대하고 든든한 제3의 미학이 존재함을 배우게 된다. 나는 산 아래에 서 있었다. 그리고 밑변을 떠받치고 있는 공동의 힘, 그와 연결된 개성들의 단단함을 보았다.
관념론은 충·효 천재,예언, 엘리트개인,미신을 주축으로, 유물론은 노동자·저항·혁명, 정치집단창작을 동력으로 양분되었다. 민중이란 정치적 저항의 인문학 속의 개념일 뿐이었다. 혹은 프로파간다의 대상일 뿐이었다. 밑변들의 인문학은 종교적 정치적으로만 유통되어 왔다. 밑변의 인문학이 굳건하지 못했던 것은, 인문학 자체가 관념론과 유물론으로 이분화되어 서로 이용하고 활용했다. 민초들은 주로 혹세무민하는 관념론 인문학(종교 )의 도구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짧은 지식으론 그 방대한 진영의 속셈을 알아차리기에는 한계가 있다. 역사가 진보하면 할수록 밑변은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지게 된다. 그래서 끊임없이 밑변의 인문학은 그 뿌리가 아래로 내려가게 되어 있다. 하지만 여전히 오래전의 낡은 인문학만으로 예술을 지탱하려 했다.
유물론의 정치적 메시지를 위한 집단 창작과도 다르고, 관념론의 천재적 엘리트 창작과 다른, 공동체창작의 효율성인 본능이다.
유물론적 접근에서 개인은 집단 속에 매몰되어 사라져 버린다. 관념론적 접근에서는 소수의 천재성에만 모든 것이 의존된다. 하지만 마을에서 나는 전혀 다른 창작 방식을 목격했다. 평범한 이들의 집단지성에 기초한 창작적 본능이다. 개인들이 사라지지도 않고, 특정 엘리트가 모든 것을 주도하지도 않으면서도, 뭔가 효율적으로 작동하는 샤로운 창작의 메커니즘.
정치적 민중들이 직업적 혁명가에 의해 교합되듯이 이 또한 밑변의 엽렵한 정치학을 담보한 기술적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 세상은 여전히 많은 사람에게 돈의 꿈을 꾸게 한다. 모차르트가 귀족 사교장의 화려한 옷을 갈망해 자신의 천재성을 사치와 도박으로 35살에 스스로를 요절시켜 버린 것처럼, 돈의 꿈은 많은 이들의 다른 영역의 천재성을 연결해 내지 못한다. 의사, 변호사, 연예인, 돈 많은 사람만 되려고 한다 나쁘다고 할 수 없지만 그 그늘이 문제다 .
예술은 두 인문학 세력들에 의한 질서, 관객의 호주머니와 저항의 메시지 속에서 길러지고 소비된다. 물론 양다리걸치기도 흔하다.
마을이라는 밑변에서 또 다른 영화의 길을 보았다.
그것은 화려한 옷이 아니라, 맨몸으로 맞부딪히는 삶에서 길어 올린 힘이었다. 각자의 개성과 능력을 살려두면서도, 수평적 협력을 통해 혼자서는 불가능한 창작적 성과를 달성하는 힘. 비전문성에서의 수평적 협력성이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힘이었는데 그 창작의 오아시스에서의 꿈을 잊지 못하고 말았다.
오늘날 틱톡과 유튜브는 개인적 차원의 창의성 활력을 보여준다. 그를 통한 글로벌 교류는 분명 의미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창작을 통한 공동창작의 분위기, 그러나 결과적으로 개인적 환원으로 귀결된다.
결국 뛰어난 개인과 수석 같은 재능의 기차역에만 도착한다. 밑변의 공동 창작의 꿈을 흔들고 더디게 만든다. 틱톡 유튜브는 주로 방송 개념의 지구적 확장이자 영화의 서사에 다가가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작은 마이크로 경제순환과 작은 로컬의 서사를 드러내지 못하는, 표피적 재미를 추구하는 할리우드영화의 후발대 프로파간다 역할만 할 뿐이다. 순간적 임팩트와 소비를 위한 콘텐츠들이 사람들을 현실로부터 각자 멀어지게 하고 진정한 공동체적 서사문화를 위축시키고 수많은 개인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정치적 저항의 본능도, 관념적 예술의 천재적 실현도 아닌, 평범한 삶 그 자체로 완결된 공동창작의 효율성. 이것이야말로 기존의 이분법을 넘어선 제3의 밑변의 길이다.
엘리트의 상상력이 아닌 민중의 땅·시간·몸·관계·웃음에서 이야기가 발원한다. 돌탑영화는 시나리오적 환상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솟아오른 경험과 공동 감각을 기록하고 재구성하는 장치가 된다. 따라서 밑변 인문학은 "살아있는 마당극의 영화적 확장판"이라 할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선 마당극에서의 참여는 창작에서의 주체가 아니라 추임새적, 흥의 참여일 뿐이었다)
땅의 철학: 특정 지역의 자연과 풍토, 마을의 장소성이 이야기의 토대가 된다. 땅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이야기의 주체다.
시간의 철학: 거대 서사(국가·이데올로기)가 아닌, 민중의 하루와 계절 속에서 흘러나오는 시간. '역사'가 아니라 '생활사'를 기록한다.
몸과 관계의 철학: 배우가 아닌 주민이 몸으로 이야기를 수행한다.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갈등·화해·유머가 곧 드라마의 부분이다.
웃음의 철학: 고통을 미학화하는 대신, 웃음과 풍자를 통해 삶을 전환한다. 이는 밑변의 회복력(resilience)이자 민주적 정서의 원천이다.
기원전 6세기 고대 아테네의 디오니소스 극장에는 1만 8천 명이 모였다. 그들은 단순히 구경꾼이 아니었다. 프로메테우스와 제우스의 공연을 보며 "인간이란, 역사란 무엇인가"를 개인적으로 인문학책을 뒤적이지 않고도 효율적으로 인문학을 배웠다. 무대 위의 갈등은 곧 그들 자신의 이야기였고, 연극이 끝나면 광장에서 토론이 이어졌다. 그렇게 아테네에서는 참주가 사라지고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각자 집에서 넷플릭스를 보며, 함께 모여 울고 웃으며 인문학을 배우며 무언가를 결정하던 경험은 사라지고 있다. 그런데 어차피 그건 자기의 땅과 자기의 시간, 자신의 이웃과 관련 없는 그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재미를 위해 만든 영화일 뿐이라면 집이나 극장이나 크게 다르지도 않다.
칸트를 읽고 헤겔을 읽는다고 쉽게 지혜가 얻어질까.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나 들뢰즈의 "되기" 개념을 배운다고 뭐가 달라질까?
그만큼 역사 철학 등의 인문학을 개인적으로 배워야 하고, 또 여유가 없는 이들은 돈이 되지 않는 인문학과 더 멀어지게 한다. 사실 기존의 인문학이란 가진 자들의 개인을 포장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아무도 듣지 않고 관심 없는 밑변에게 향하는 다른 지식인의 복붙퍼포만스일 경우가 많다.
집에서 개별 소비하는 현대 영화로는 더욱 불가능하다. 모차르트처럼 특정 계층의 소비의식, 문화만 학습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들의 집, 그들의 옷, 그들의 음식
아테네 집결의 실제 동력은 종교적-정치적 의무, 경제적 인센티브, 집단적 위기감이었다.
현대의 마을영화가 성공하려면 새로운 형태의 집결 조건이 필요하다. AI 대중창작시대가 도래하여 누구나 편집하고 누구나 창작자이며 누구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 도래하였다. AI 대중 창작시대와 강압적인 디오니소스 축제의 조건이 다르지만 같아진다.
공간과 시간의 인문학—그건 생활을 통해 자연히 발현된다. 자신의 땅과 관계의 문화를 바탕으로 굳건한 도움받기가 가능하다. 문제는 이제 그 땅과 시간을 같이 하는 세대가 사라지고 개별화된 도시적 삶들이 유일해지기 때문에 이 시도도 한국에서는 5년 뒤에는 불가능해지고 있다. 아마 제3세계 로컬에서만 그 공동체 삶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을영화는 디오니소스적 공동체 예술의 현대적 부활이며, 엘리트의 기득권적 사변 대신 민중의 땅·시간·몸·관계·웃음에서 발화하는 밑변의 인문학이 필요하다 .이것은 글로벌 생활서사 교류와 마이크로 경제 순환의 실험, 작은 단위의 민주주의 선행 학습이기도 하다.
마을 주민이 배우·제작자가 되고, 이야기는 다시 세계의 다른 지역에서 상영·교류한다. 물론 OTT와 유튜브가 거들면 효율적일 것이다. 외부 관광객과 예술가가 이 과정에 참여하면서 소규모 경제 순환이 형성되게 한다. 영화는 단순한 소비재가 아니라, 마을 경제와 문화가 맞물리는 매개가 되도록 할 수 있다.
OTT의 표준화된 글로벌 상품콘텐츠와 달리, 다양한 변방의 생활 서사가 교류되는 새로운 국제 예술 흐름을 창출해야 한다. 이는 단순한 기존의 개인-저항의 인문학적 사유가 아니라, 예술·정치·경제가 함께 작동하는 새로운 생활철학이며, 밑변의 민초들이 본래 갖고 있는 집단적 지혜와 자연적 소통 능력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다. 대안문화로서의 마중물이다.
너무 작아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며 피는 은행나무꽃과 함께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 마을에서만 탄생한다. 5년 후 한국에서는 불가능해질지 모르지만, 제3세계 밑변의 마을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그 은행나무꽃 같은 우리가 모르는 로컬의 꽃과 로컬영화들이 피어나고 있을 것이다.
작은 마을 100명이 100개 마을에서 디오니소스같은 인문학축제를 마을영화로 해 낼 수 있었던 나의 20년을 추억하며.
PS 은행나무 꽃은 밤에만 피는 것이 아니라 주로 낮에 핍니다.
은행나무의 개화 시기는 보통 4월에서 5월 사이인데, 이때 잎이 돋아나면서 함께 꽃이 핍니다. 수꽃의 경우 이른 아침에 꽃가루를 날리는 경우가 있어, 이 시간대에 수분이 이루어지기 가장 이상적인 조건이 만들어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결론적으로, 은행나무는 밤에만 피는 꽃이 아니며, 낮에 피는 꽃에 속합니다. 다만, 꽃의 크기가 작고 눈에 잘 띄지 않아서 개화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많습니다.(챗GP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