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셸 오 Dec 07. 2023

엘더플라워 블랙티

 둘썸


  "우리의 눈은 빛을 거울처럼 반사하기도 하고 우물처럼 빨아들이기도 하고.. 입술은 우리의 모든 기쁨과 슬픔과 영혼을 나타내는 무엇이고 각기 다른 붉은색을 띤 의미의 매듭이야. 코는  저마다 다른 형태를 지닌 호기심의 기구지" 내 이름은 빨강은 말한다.


" 아! 맞아요.. 제가 이 둘썸의 '엘더플라워 블랙티'를 마실 때 당신이 방금 말한 구절을 떠올렸어요. "  

 


미요가 둘썸에 들어가는 날은 한 여름 대낮의 태양을 머리에 이고 오랫동안 걷는 날이다.

그곳에는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여름의 한정판 시그니처 메뉴 '엘더 플라워 블랙티'가 있다.

그녀가 그 노란 달리아색처럼 빛나는 티 한 잔을 바라보자면 그곳은 어느덧 반짝반짝 빛나는 설렘의 나라가 완성된다. 미요는 '엘더플라워 블랙티'에서 오래된 미래의 이야기를 엿듣는다. 홍차와 계피와 레몬향과 배 한 조각이 그려내는 역사와 창조를 읽는다.


 꽃향이 물씬 난다. 얼음이 가득한 투명컵에 홍차 티백이 담겼고 계피 스틱이 담겨있다. 그리고 그 음료를 한 모금 마시는 순간 얼음에 절인 꽃향기가 목덜미를 타고 내려가며 꽃밭 속에 앉아 시원한 얼음욕을 하는 듯 맑고 경쾌한 향기가 세포 곳곳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카페 유리창으로 비쳐드는 햇살아래 반짝이는 블랙티는 이름처럼 검지 않다. 처음에는 미요의 눈이 그 '엘더플라워블랙티' 전체를 빨아들이고 다음엔 잔잔한 꽃향과 계피향을 맡느라 킁킁댄다. 코의 차례다.

그다음 더위에 붉게 달은 입술을 적시고 달콤하고 부드러운 혀의 감각을 느낀다.

그러면 뜨거웠던 몸의 기운이 서늘한 가을날의 기후처럼 서서히 식어간다. 그리고 그녀는 책을 펼친다.


'내 이름은 빨강이다'. 아주 오래된 친구.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만 알지를 못한다." 내 이름은 빨강은 말한다.


"아뇨 저는 죽음을 알아요. 죽음 이후의 세계도 알아요. 저희 엄마가 숨을 거둘 때 옆에서 지켜보았답니다. 풍선에서 공기가 빠져나가듯  얼굴에서 숨이 빠져나가던걸요. 숨이 빠진 후 엄마의 얼굴.. 눈 밑에 검은 그늘이 지더군요.  죽음 이후의 세계는 가보지는 않았지만  성경에 쓰여 있는 것을 믿어요. 새로운 천국이 있다는 것을요. 하지만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네요."

미요는 말한다.


"사사건건 간섭하는 남편이 없는 걸 다행으로 아세요." 내 이름은 빨강은 말한다.


"그건 그래요. 그렇지만 성경에 그런 말도 있지요. 구유가 더러워도 소로 인해 얻는 것이 많다고" 미요는 말한다.

"기적의 손과 아름다운 눈을 가진 화가" 내 이름은 빨강은 말한다.


"기적의 손과 아름다운 혀를 가진 바리스타" 미요는 말한다.


"우리의 인생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부와 권력, 그리고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믿지 못할 사랑이야기뿐이란 걸" 내 이름은 빨강은 말한다.


"그래요 부는 제게 관심을 끌지만 권력은 관심밖이군요. 왜냐하면 부를 가진 자가 추구하는 것이 권력이라고 하던데 아마도 저는 아직 부를 갖지 못해서 권력은 관심밖인지도 몰라요. 믿지 못할 사랑이야기는 동화에서나 가능하다는 것은 인정할게요. 백설공주의 왕자님. 잠자는 숲 속의 공주의 왕자님. 내가 공주가 아닌데도 백마 탄 왕자를 꿈꾸었지요.  어릴 때 그런 동화책을 읽은 제 탓인가요? 흐흐흐"



미요는 여기쯤에서 차를 한 잔 마신다. 계피향이 좀 보다 더 짙어졌다. 여름이 지나면 이 차를 더 이상 마실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 내년 여름에도 이와 같은 차가 나올지도 의문이다.


이 차를 만든 사람은 이제 이전 과는 다른 음료를 창조하는 고통을 느끼리라. 창조의 고통은 예술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음료를 만드는 것도 예술이 되는 건가?


'엘더플라워 블랙티'

이름만큼 아름다운 이 차를 만든 주인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었던가?  수많은 홍차를 마셨을 것이고 수많은 과일 청을 넣어봤을 것이고 계피도 과일조각도 이것저것 넣고 빼고 했을 것이다.


사물에는 본질의 아름다움과 유일함이 있지만 그것을 혼합했을 때는 그  유일함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건데 이 차에는 그 본질들이 하나하나 살아서 움직인다. 눈에서 코에서 입으로.. 차 한잔으로 눈이 번쩍 뜨이고 늘어졌던 몸 세포들이 기포들처럼 솟아오른다. 그만큼 미요의 몸에 기운이 없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갑자기 내 이름은 빨강은 말한다.


"늙는다는 것은 단지 언덕을 힘겹게 올라가는 것만이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의욕상실이기도 하다"


미요는 이번엔 대답 없이 생각에 잠긴다.

미요는 자신이 늙지는 않았지만 늙어간다고 느낀다. 의욕상실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은 육체적 욕망과도 연관된다. 그것은 또한 관심거리가 차츰 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다 그렇고 그런 거지.

늙어 간다는 것은 이미 다 경험해 봐서 안다는 것이니까 호기심도 사라졌다는 의미다.


"해가 나와서 갑자기 따스해지자 저도 육체가 있고 살갗과 목덜미와 젖꼭지가 있다는 것이 느껴졌어요." 내 이름은 빨강이 계속해서 말한다.


"그래요 저는 갑자기 이 차 한잔을 마시는 순간 내 콧구멍과 혀의 감각과 목덜미와 살갛을 느꼈어요.

살갛도 무더위에 풀이 죽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미요는 나직하게 속삭인다.


 이제  미요의 컵에는 얼음 조각만 남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내 이름은 빨강> 이 한여름의 햇살을 받고 테이블에 놓였다. 






 




이전 06화 크림치즈 펌킨 케이크 & 블루베리 요거트 프라푸치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