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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넉넉 Apr 05. 2022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춤추라, 아무도 바라보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라,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노래하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은 것처럼.

일하라, 돈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라,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알프레드 디 수자



27번째 생일에 시집을 선물로 받았다. 제목을 나지막이 읊조렸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제목을 다 말하기도 전에 멈췄다. 마음이 시려오며 머릿속에 풍선처럼 떠오르는 얼굴들이 있다.

어떻게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이게 가능한 일이라면, 나는 정말 상처받지 않은 사람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이 시인은 자신의 상처를 잊기 위해, 아니 극복하기 위해 이런 노력들을 한 걸까?


*

오랜만에 남편과 함께 재재를 어린이집에 데려다주었다. 코로나로 인해 재택근무가 잦아지면서 자주 밖에 나가지 않는 나보다 계속 연구실에 나가고 운전도 담당하는 남편이 재재를 데려다준다. 재재는 이제 어린이집에 갈 때 이전보다 훨씬 덜 울고 덤덤하게 선생님의 손을 잡고 자기 반으로 들어간다며 남편이 부쩍 자주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해서인지, 별 생각 없이, 걱정 없이 재재의 손을 잡고 함께 어린이집 현관까지 갔다. 나와 남편이 모두 있으면 재재는 항상 나의 손을 꼬옥 잡는다. 더 자주 나를 올려다보며 웃거나 찡그리고, 더 자주 ‘엄마? 엄마!’를 부르며 나의 다정한 대답을 확인한다. 남편이 서운해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만일 남편이 혹여 그런 감정을 표현한다면 재재가 아빠와 나누는 고유한 행복은 따로 있을 것이라 말해줄 것이다. 


어린이집 현관에 담임선생님이 나와 반갑게 재재를 맞았을 때, 재재는 내 손을 놓지 않고 더 세게 잡는다. 내 뒤로 주춤주춤 숨으면서 끙끙댄다. 그러면서 목이 메는 소리로, 엄마- 엄마- 엄마- 하더니 삐죽삐죽 우는 얼굴이 되면서 결국 엉엉 오열을 한다. 어린이집 전체가 떠내려갈 것처럼.


재재를 꼭 안아주면서 말한다. “재재, 선생님이랑 친구들이랑 재미있게 놀고 맛있는 거 먹고 있어. 그러면 시간이 이렇-게 동그랗게 돌 거야. 그러면 엄마가 다시 와서 우리 재재 꼭 안아줄게! 맛있는 간식도 같이 먹을 수 있어. [재재가 운다.] 그때부터는 엄마랑 주욱 같이 있을 거야. 우리 이키랑 구구(재재 인형 친구들)랑도 재미있는 이야기하고 놀자. [계속 운다.] 그때까지는 재재가 엄마를 조금 기다려줘야 해. 엄마는 재재 눈에 안 보여도 재재를 마음으로 다 보고 있어. 엄마는 우리 재재가 항상 좋아. 항상 사랑해. 이따 보자, 재재야!”

    그러고 나서 서둘러 뒤돌아 어린이집 밖으로 나온다. 그 뒤로 “엄마-!” 하고 울리는 재재의 목소리가 들린다. 


*

엄마- 엄마- 엄마-


내가 엄마를 그렇게 부르던 모습이 겹친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린 모습의 나도 그렇게 엄마를 서럽게 불러대던 때가 있었다. 재재만큼 어렸을 때였을까. 그보다는 기억할 수 있을 정도의 시기였을까. 나도 그렇게 엄마를 찾아 헤맸던 것 같다. 엄마가 있는데도 꼭 둘리처럼 엄마를 찾아 헤맸다. 손 한 번 더 애정 어린 눈으로 잡아주고 오냐오냐 내 딸 오늘도 엄마 없이 힘들었지 오늘은 뭐했어? 아이쿠 잘했네 하며 품안에 안아줄 수 있는 그런 따뜻하고 다정한 엄마를. 내 엄마는 항상 볼 수 있는 곳에 있었지만, 내가 찾아 헤매는 엄마는 존재하지 않았다. 


    “빨리 빨리 안 와?!”

    “왜 이러게 지저분하게 하고 있어?!”

    “엄마가 식사 준비하고 있으면 빨리 빨리 와서 도울 줄도 알아야지!”

    “그럴 줄 알았다, 내가.”

    “용돈 달라는 말을 이렇게 늦게 하면 내가 용돈을 어디서 구해다 주니?”

    “너 이렇게 방 청소 안 하면 나중에 누가 너하고 결혼하겠니? 시어머니한테도 욕 먹어!”


다른 여자애들의 엄마가 딸 얼굴을 두 손으로 쓱싹쓱싹 비비며 웃어줄 때, 모녀가 하교 후 맛있는 거 먹자고 손잡고 걸어갈 때, 친구가 고민이 있었는데 엄마랑 어젯밤 얘기하고 그게 싹 사라졌다고 말할 때, 비오는 날 하교 때 어떤 아줌마가 “00야~” 하고 우중충한 하늘 아래 우산을 들고 화창한 얼굴로 자기 딸을 부를 때, 친구랑 함께 있을 때 그의 엄마가 나에게 “너도 같이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 이모가 사줄게”라고 말할 때, 나는 그럴 때 그 사람이 내 엄마였으면, 하고 바랐던 적이 있다. 빛나는 눈으로 친구의 엄마를 바라보며 그분의 마음에 들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내 엄마에게 미안했다. 그래서 슬쩍 고개를 숙이고 나의 못나고 나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다른 사이좋은 ‘딸-엄마 콤비’는 가급적 눈에 담지 않으려 했다.


불을 끄고 침대에 웅크려 누워, 어느 날은 “하나님, 오늘 봤던 그 친구 엄마랑 제 엄마를 바꿔주세요”라며 기도한 적도 있고, 좀 더 자라 어느 날에는 “하나님, 엄마의 이 부분만이라도 바꿔주시면 안 돼요?” 하고 훌쩍거리며 잠에 들곤 했다. 그렇게 엄마에게 다 털어놓지 못하고, 엄마에게 사과 받지 못한 마음이 밤에 눈 감고 아침에 눈 뜨는 동안 없어지지 않고 아픔을 모아두는 서랍 속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엄마는 젊은 시절 그 어렵다던 3교대 간호사로서 너무 바빴는데, 일이 조금 바쁘거나 바쁘지 않을 때는 나와 있는 그 짧은 시간에 바빴다. 바쁜 엄마. 바쁜 게 습관인 것 같던 엄마. 나를 어딘가에 데려다주고 바쁘게 뒤돌아서 사라지던 엄마. 다정한 말 한 마디, 격려의 언어, 함께 걸어주는 공감, 어려운 것을 천천히 설명해주는 인내를 가장 가까운 엄마에게서 경험해본 적이 별로 없는 나는 엄마에게서 자주 봤던 차갑고 짧고 바쁜 말들을 할 바에야 입을 잘 열지 않는 아이가 되었다. 


상처받은 사람처럼 친구들과 어울렸고, 상처받은 사람처럼 연애를 했다.상처받은 사람의 모습으로 사람들을 사랑했더니 나의 표현이 어딘가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사람들이 하나, 둘, 멀어져갔다. 어떤 때는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누군가에게 다가가기도,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근본’이 바뀌지 않는다는 생각에 이르면 다시금 우울해지고 울적해지곤 했다.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 같은, 사랑받은 티가 폴폴 나는 친구들이나 드라마 여주인공이 하는 말과 표정을 열심히 따라해 보기도 했지만 실전에서는 실천해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내 눈에 매력이 넘치는 친구와 일 년 같은 반일 때, 드라마가 방영되는 동안, 일시적으로는 모방할 수 있었지만, 친구와 헤어지고 드라마가 종영되었을 때는 다시 ‘나의 외로운 일상’으로 돌아가 있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나에게 최고의 사랑을 주지 못한 것이 엄마가 너무 바빴던 것 때문이었다기보다는 엄마의 성향과 살아온 배경 때문이었을 것이다. 시간을 너무 짧게 보내주기 때문이었다기보다는 잠시 잠깐 함께 있었을 때에도 차갑고 바쁜 언어들을 주고받았기에 속이 메말라있었을 것이다.


크면서 엄마의 전체가 밉지는 않았다. 머리가 크고 생각의 폭도 넓어지다 보니 엄마에게도 사정이 있었음을, 엄마에게도 고유의 성격이 있음을, 엄마도 나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린 나에게 ‘엄마 노릇’을 하려고 애를 쓰던 모습들도 희미한 빛을 벗고 내 눈앞에 필름처럼 후루룩, 지나가는 걸 상상할 수 있다. 슬프기는 하지만 엄마의 삶을 이해하려 하면서 엄마 사랑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기도 했다. 엄마에게도 나를 사랑스러운 딸로만 여기며 무한한 애정을 쏟아부어주지 못할 만한 개인적인 역사가 있다는 것을….


단지 어떤 부분들은 여전히 내 안에 상처로 남아있다. 오랜 세월 함께 살며 엄마의 무심하고 차가운 언어와 표정들이 내 안에 괜찮지 않은 조각들로 남아서, 문득 문득 하나씩 쓴 약을 먹어야 하는 시간처럼, 그렇게 떠오른다.


*

언제부터 나는 진심으로 웃었던가? 진심으로 슬픈 걸 슬프다고 말하며 울 줄 알기 시작했던가?


아, 못나게 일그러진 내 얼굴과 우는 목소리를 한 시간 가량 아무 말 없이 다 받아주던 친구들과의 시간이 있었지. 이빨 빠진 늑대처럼 서럽게 울어낼 때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고 같이 땀 흘리며 꼬옥 안아주던 남편과의 시간이 있었지. 그릇을 깨뜨려도, 말을 조금 떨면서 느리게 해도, 배웠어도 잘 이해가 안 되는 지식을 다시 설명할 때 바보 같아 보여도, “일단 천천히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대로 해 봐. 처음부터 잘 하는 사람 없어”라고 눈으로 입으로 말해주는 사람들이 있었지. 내가 우스갯소리를 하고 허허 웃으면 같이 더 크게 하하 웃어주는 사람들이 있었지.


나는 아직도,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할 만큼 충분히 강하거나 훌훌 가벼운 사람이 아니다. 그래도 뭐, 답이 없는 사람은 아니다. 서로 마음을 여는 시간에 상처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같이 나누었더니 조금씩 가벼워짐을 느낀다. 한없이 상처받은 사람처럼 행동하고도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는 경험을 했더니 조금씩 강해짐을 느낀다. 조금씩,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엄마에게 내가 받고 싶었던 형태의 사랑을, 조금 방향을 바꾸어 내가 엄마에게 주려고 노력한다. 그러면 엄마의 사랑스러운 미소를 볼 수 있다. 엄마에게 내가 받지 못했던 형태의 사랑을, 나는 남편과 재재에게, 그리고 누구보다 나 자신에게 넘치게 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그러면 그토록 원했던 행복감이라는 걸 매일 느낄 수 있다.


*

오후 4시, 때로는 5시. 남편과 함께, 재재를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간다. 남편이 자주 재재를 데리러 가지만, 오늘은 함께, 내가 먼저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어린이집 현관으로 들어가 쭈그려 앉고 “재재야!” 부른다. 세상에서 가장 환한 웃음. 꺄르르 소리를 지르며 달려오는 재재를 두 팔 벌려 꼬옥 안아준다. 재재가 달려와 껴안는 힘에 나는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다. 


사랑할 수 있다. 상처받았지만 치유되고 성장하는 사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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