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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술공장으로

또 새로운 유리천장이 생겼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생산본부 팀장으로 발령이 났다.

내가 생각한 것보다 구매팀을(당시 구매팀장) 빨리 떠나는 게 아쉬웠지만, 워낙 여러 팀을 거쳐왔기에 언젠가 있을 팀 이동을 예상하지 못했던 건 아니다. 다만 공장이 내 예상지에 없었던 것뿐.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 자리는 축구장 22배에 달하는 공장부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관리하고 책임진다고 보면 된다. 생산계획, 부자재 입고부터 제품 재고/출고, 공장 예산, 원가 관리, 건물/자산 관리 등 생산에 관련된 직간접 업무와 우리 직원들은 물론 협력사 직원들, 용역까지 몇백 명의 인력을 관리하고 지원해야 하며, 노조측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심지어 부지 내 나무 한그루, 잔디 높이까지 체크해야 하며 꾸준한 지역 대외활동도 중요한 업무 중 하나이다. 말이 팀장이지 사실 회사 하나 운영하는 것만큼의 업무 스팩트럼이 넓다. 그래서 이 자리는 대대로 생산본부에서도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 오는 자리였다.

내가 오기 전까지는.


어린(비교적) 여자팀장이라니..

나도 나지만 아마 우리 회사 많은 사람들이, 특히 공장 직원들이 나 못지않게 많이 놀랐을 것이다.



어디든 공장이란 곳은 그 특성상 비슷한 점이 있다.

심리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벽이 높고 폐쇄적이고 보수적이다.


나쁜 뜻으로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칫 큰 사고가 될 수 있기에 원리 원칙이 최우선으로 지켜져야 한다. 촌스럽게만 보이는 유니폼도 그러한 이유로 입는 것이다. 안전과 위생, 품질, 기한 엄수 등 공장은 유통성과 다양성보다는 원리 원칙과 통일성이 강조되어야 하는 곳이다.

아무튼 이건 나중에 깨달은 것이고, 발령 당시에는 생각만 해도 깝깝하게 느껴질 정도로 새 업무를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1개월 만에 10kg이 빠질 만큼.


어려움에 봉착하며 무조건 책 속으로


우선, 이 자리에 대한 부담감과 두려움이 너무나도 컸다. 여러 팀을 거치면서 매번 새로운 일을 도전했었고, 기존의 시스템을 개선하고 변화를 주어야 했다. 관성을 고수하려는 사람들과 당연히 트러블도 있었고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지만 늘 어느 정도의 결과는 만들어 냈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무엇을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매일 아침 미팅에서 직원들이 하는 말이 마치 외계어처럼 들렸다. 질문이라는 것도 뭘 알아야 할 수 있다는 걸 그때 뼈저리게 실감했고.


이것이 내 안에서 일어나는 스트레스라면, 두 번째는 외부로부터 발생하는 것이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공장은 그 특성상 보수적이고 변화가 적을 수밖에 없다. 이런 환경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사람들이 나를 반기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나는 모르는 것이 많았기에 경험 많은 중간 관리자들의 도움이 절실했지만 나에 대한 반감은 예상보다 훨씬 더 컸다.


발령 나고 3일 정도 지났나..

여전히 어리둥절한 상태로 산더미처럼 쌓인 결재 서류를 검토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바꾸려고 하지 마세요. 반란 일어납니다!"


그는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등을 돌리고 앉은 채로 이런 말을 했다.


설마,

어느 간 큰 사람이 팀장에게 대놓고 그런 말을 하겠냐고?

나는 단어나 뉘앙스만 조금씩 다를 뿐 비슷한 말들을 살면서 참 많이도 들었다.


아무것도 하지 마라
뭘 바꾸려고 하지 마라
튀려고 하지 마라
너 때문에 우리까지 해야 하지 않냐


뭐 이런 대놓고 하는 말 외에도 공장일을 맡으면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상처를 받았고 혼자 울기도 하고 육체적으로 아프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상처로 남겨두지 않았다.


어려움에 봉착하면 늘 그러했 듯,

책을 읽으며 해답을 찾으려 노력하고

명상을 하면서 마음을 다스리고

주위 사람들과 상의하며 도움을 받고

분주히 뛰어다니며 실행했다.


새벽 명상과 저녁 명상을 함께하는 냥이들. 싱잉볼과 다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일단, 부정적인 사람들의 말과 시선을 속상해하고 신경 쓰는 것은 사치라 할 정도로 너무나 바빴다. 퇴근하고 집에서 저녁을 먹다가 식탁에 앉은 채로 잠이 든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는데, 돌이켜보면 이건 차라리  고맙기까지 하다. 이런저런 속상한 일을 되새김질하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맥락만 보았다.

상황이 어떠한지 파악하고 그냥 내가 해야 할 일에만 집중했다.

어차피 이런저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내가 잘하든 못하든 말을 할 것이니, 그냥 내 길을 묵묵히 걸었다.

늘 하던 대로.


때로는 사람들의 말이 조언을 가장한 한계일 수도,
한계라 생각했지만 진정한 조언일 수도


아직도 나는 배우고 성장하고 있다.

나의 세계를 더 키우고 건강하게 만들어 매일 일어나는 이런저런 이슈를 그 안에 보듬고 한 발짝 나아가고 있다. 매일매일.






꽤 시간이 지난 지금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어느 팀에서 일할 때 보다 만족하며 일하고 있다.

공장이 체질인가 싶을 정도로

(물론 우리 팀원들이나 생산본부 직원들도 나로 인해 조금이나마 이전보다는 더 만족스러운 상황이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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