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그리고 사람들

이제는 서울살이에 꽤 익숙해진 것 같기도?

by 이수정

서울은 참 오묘한 곳이다. 고향이 경상도 구미인 나는 어릴 때부터 서울살이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그래서 취직을 서울로 해서 성인이 되어서는 서울에서 살아야지 하는 막연한 꿈과 기대감이 있었다. 서울에서 산다면 대학로에 가서 연극도 보고, 명동거리도 신나게 걸어보고, 63 빌딩도 가보고, 남산타워와 롯데월드도.. 한강에서 자전거도 타봐야지.. 등등. 말로는 다 못할 만큼의 버킷리스트가 있었다.


2014년도에 서울로 취직이 된 나는 처음 들어 본 ‘도봉구‘라는 곳에 둥지를 틀었다. 직장과 가까웠고 서울의 다른 구보다 집값이 저렴한 곳이라 이 곳에 자리 잡게 되었다. 나의 서울에서의 첫 번째 집은 5평 남짓의 원룸이었다. 급하게 원룸을 구하고 이불이 없어 그날 밤엔 입고 있던 잠바를 덮고 방바닥에서 잤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마냥 좋았다. 내가 드디어 취직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다니.. 그것도 서울로 취직을 하였고 원하는 직업도 가지게 되었다. 급하게 취직이 되어 원룸을 구하기 전에는 아는 동기들에게 부탁하여 며칠 신세를 지기도 했다. 처음엔 현주의 산본역 주변에 위치한 원룸에서 같이 살려고 했으나 내 직장인 창동역까지는 1시간 16분이 걸렸다. 4호선을 안 갈아타고 쭉 갈 수 있는 장점이 있었지만 너무 멀어서 포기하고 현주와 함께 산본역 주변에서 맛있는 밥과 커피를 먹고 헤어졌던 기억이 있다. 다른 동기 언니인 미영언니의 원룸은 야탑역 주변에 있었다. 취업 준비 할 때부터 친했던 언니라 이 언니집에서 며칠을 살면서 출퇴근을 하였는데, 4 교대 근무를 하던 나는 야간 근무를 끝내고 미영언니집으로 가는 지하철을 두세 번 갈아타고 갈 때마다 꾸벅꾸벅 졸다가 종점에서 내리곤 했다. 출근 시간만 한 시간 반 정도 걸렸다. 그래서 결국 직장과 도보권인 도봉구 창동에 원룸을 구하게 된 것이다.


처음으로 내 이름을 넣어 원룸의 전세계약을 하였다.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원룸을 구할 수 있었는데, 엄마는 2천만 원을 보태 준다고 하였다.

“엄마가 돈이 어디 있다고…??”

“엄마가 그 정도는 보태줄 수 있으니까 너는 3천만 원만 대출받아. 사회초년생이 5천만 원이나 빌리는 건 부담될 수 있잖아.” (당시 원룸 전세가격은 5천만원이었다.)

그렇게 나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엄마의 도움을 받는, 둥지에서 못 벗어난 새끼새 같았다. 그때의 내 나이 29살이었다. 나는 엄마가 따로 모은 돈이 있는 줄 알았다. 후에 남동생에게 들은 얘기로는 엄마가 내 원룸 보증금을 보태주기 위해 집을 팔았다는 것이었다. 우리 엄마는 우리 아버지가 내 나이 22살에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대학생인 우리 남매 셋을 키워 낸 슈퍼 원더우먼 보다 더 멋진 사람이다. 6남매의 맏이로 태어 난 우리 엄마는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외할머니 때문에 그렇게 입고 싶어 했던 중학교 교복도 못 입어본 사람이다. 엄마는 교복을 못 입어본 게 그렇게 한이 될 줄 몰랐단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내가 취직을 위한 준비 기간이 몇 년씩 길어질 때도 끝까지 지원해 주었다. 우리엄마는 기존에 하던 일 외에 저녁 및 주말에 식당일까지 해가면서 나에게 용돈을 보내 주었다. 설거지를 많이 해서 퉁퉁 부운 엄마의 손을 볼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나중에 후회되는 일은 내 자식한테는 시키고 싶지 않아서 그랬을까.. 그렇게 나의 긴 취직준비 기간 동안 엄마는 나와 함께 도서관을 가면서 중학교 검정고시를 통과하였고, 고등학교 졸업장도 연이어 따게 되었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배웠다. 또한 세상에서 제일 자랑스러운 사람은 이재용도 아니고 스티브잡스도 아니고 일론 머스크도 아닌, 우리 엄마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우리 엄마는 내 전세 보증금을 위해 집을 팔았다는 말을 나에게 하지 않았다. 나는 몇 년이 지난 후에야 남동생을 통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고맙다는 마음보다는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리고 서울에서 잘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시작한 서울살이는 나에게 다양한 경험을 선물해 주었다. 그동안 생각만 해오던 서울에서의 버킷리스트를 하나하나씩 해나갔다.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놀았다. 고향이 경상도이지만 일찍부터 서울로 취직한 친한 중고등학교 친구들도 있어서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외로운 줄 몰랐다. 서울생활은 나에게 큰 만족감을 주었다. 티브이에 나오는 맛집도 바로바로 찾아갈 수 있었고, 핫플레이스도 갈 수 있고 뮤지컬이나 공연도 쉽게 볼 수 있었다. 어떤 날은 큰 창이 있는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지나가는 사람들 구경도 했고, 친한 후배와 한강에 피크닉도 다녀왔다.


그렇게 나는 점차 서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근데 왜 사투리는 안 고쳐지는 것인가)

서울살이가 올해로 14년째이다.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나 일적으로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나와 같은 성향의 사람도 있었고 정반대의 사람도 있었다. 처음에는 이해 안 가는 사람들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인정하게 된다. 나도 어쩌면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이해 안 가는 하나의 인간 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또한 인간관계에서의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 사람에게 인간적인 친밀감을 느끼고 잘해주는 만큼 그 사람에게 그만큼 돌려받기를 기대하지 않고, 주는 행복을 알게 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히 여기고 있다.


올해도 직장에서는 상반기에 인사이동이 있었고, 정든 팀원들을 떠나보내고 다른 새로운 팀원들과 지내고 있다. ‘토마토‘ 같은 팀장님( 나의 책 ‘삶에 대한 옹호‘에 나오는 팀장님)은 다른 부서로 이동하였다. 처음에는 헤어지는 게 너무 아쉬워서 운 적도 있었다. 이제는 ’ 시절인연’이라 생각하고 언제든 다시 일하면서 만날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많이 배우게 된다. 그들의 평소 마인드나 습관, 일처리 능력까지도.. 이렇게 부대끼면서 성장하는 게 좋다. 팀원들은 가족만큼이나 많이 얼굴을 보게 되니 또 다른 가족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만나서 같이 일하게 된 것도 큰 인연이 아니던가.


언젠가 남편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 사람들 개인 하나하나는 톱니바퀴의 한 조각과 같으니 본인이 책임감을 가지고 잘 움직인다면 전체적인 바퀴도 잘 돌아가지 않겠느냐고 했던 말. 나는 요즘 그 말을 생각하면서 지내고 있다. 내 자리에서 맡은 바를 잘해나가는 사람이 돼야지. 그리고 책임감을 가지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또한 한 사람과 친해지면 말을 편하게 하고 서슴없이 장난도 많이 치게 되는데, 그 사람이 기분 나빠할 무례한 장난은 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도 한다. 점 점 어른이 돼 가고 있는 건가.. (글을 쓰다 보니 엄청 어른스러워진 것 같아서 뿌듯한 마음이 들고 막 그러네?)


모든 날이 지금처럼 이었음 한다. 그러려면 나도 잘해야 한다. 그동안 잘해 왔고, 앞으로도 잘할 거라 믿는다. 나 자신에게 오늘은 맛있는 음식을 선물해 주어야겠다.(갑자기?)

연재일에 맞춰 글도 꼬박꼬박 잘 쓰고 있는 나. 칭찬해! 앞으로도 이 평화로운 일상을 위해 차근차근 해나가 보자.

월, 목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