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늘도 나와 협업한다
서른이 된 지금, 대학생 시절을 떠올리면 동기들과 함께했던 풋풋하고 몽글몽글한 추억이 먼저 생각난다. 새터(신입생 환영회) 날, 각 지역에서 모인 친구들과 서먹하게 인사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언제 그렇게 친해져서 매일같이 어울려 다녔는지. 그렇게 한참을 추억 여행을 하다 보면, 지금은 미화되었지만 당시에는 무척 고통받았던 기억도 떠오르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조별과제다.
대학생 중 조별과제를 모두 피해서 졸업한 사람이 과연 존재하기나 할까? 그만큼 대학생에게 조별과제는 필수악으로, 이상하게 가해자는 없지만 피해자만 양산되는 시스템이었다. 나 또한 다양한 조별과제를 경험하면서 똑부러진 선배의 하드캐리를 받기도 하고, 반대로 빌런 때문에 고통을 받기도 했다. 조별과제에 대한 우선순위는 팀원마다 다르기에, 결국 아쉬운 사람이 우물을 팔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개중에 팀원을 잘 만나 이상적인 조별과제를 경험하고 나면, 이래서 협업이 필요하구나 납득하게 된다. 팀원마다 성향, 경험, 역량, 전문성 그 모든 것이 다르기에, 상호보완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을 때 집단은 개인을 압도하는 퍼포먼스를 낼 수 있으니까. 물론 개개인이 겪는 스트레스와는 별개로 말이다.
그러면 반대로, 나와 똑같은 팀원들로만 이루어진 협업은 어떨까?
나에게는 인생이 수많은 '나'로 구성된, 영원히 끝나지 않는 조별과제 같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 그리고 내일의 내가 끊임없이 협업한다. 이 셋은 그날그날의 컨디션을 제외하면 성향, 경험, 역량, 전문성 그 무엇도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 그렇기에 이들의 조별과제 기여도는 순수 업무량으로 결정된다.
어제의 내가 수행한 업무량이 부족했다면,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에게 그만큼 업무가 과중되겠지. 일부러 태업을 한 건지,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어제의 내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의 나마저 업무량이 부족하다면, 혼자 괴로워할 내일의 내가 안쓰럽기도 하고, 내일의 내가 업무를 무사히 끝낼 거라는 보장도 없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야근을 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살아가면서 계속 되풀이된다.
누군가는 대외적인 모습을 보고 성실하다, 책임감이 강하다 판단하겠지만, 정작 내 속을 들여다보면 함께하는 팀원들, 즉 나에 대한 원망과 연민, 불신만 쌓이는 꼴이다. 그리고 이런 조별과제가 장기화된다면 누구도 건강한 정신 상태를 유지할 수 없을 거다.
당장 업무량이나 외부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내 마음가짐뿐. 타인과 협업할 때 최소한의 인사치레라도 하는 것처럼, 나에게도 느슨한 기대와 인정, 관용이 필요하지 않을까.
과거의 내가 의도적으로 태업을 한 게 아니라면, 당시의 나로서는 그게 최선이었을 테니 너무 나무라지는 않았으면 한다. 내일의 나 또한 늘 그랬듯 자신의 몫을 할 테니, 너무 앞서서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찾아오기 전까지 우리의 조별과제는 끝나지 않는다. 그러니 조금은 힘을 빼도 괜찮다. 그렇게 비축해 둔 힘으로 다시 내일을 살아가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