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까지 얼리지는 말아요
착한 사람. 회사에서 착하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고 한다. 왜 칭찬이 아닌 걸까? 착하다는 말은 일을 지지리도 못하는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인사치레여서 그럴 수도 있고, 왜냐하면 착하다는 것은 꽤나 주관적이므로, 아니면 착함이 회사에서 일을 할 때 불필요하거나 심지어 있어서는 안 될 속성(?)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착한 사람이자 착한 회사원이라는 건 너는 바보야, 를 입 밖으로 낼 수 없을 때 쓰는 말일지도 모른다.
좀 과격하게 표현하기는 했지만 이 착한 회사원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해 보게 된 건 바로 내가 그 착한 회사원이기 때문이다. 입사해서부터 연차가 쌓인 지금까지도 나는 이 칭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특히 내가 하는 일은 회사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사람들과 전화로 소통할 일이 많은데, 내가 전화를 탁 끊자마자 종종 같은 사무실에서 내 통화를 듣던 선배들로부터 ‘오늘도 착한 아아이었어?’라는 말을 듣곤 했다. 배시시 웃는 게 정답이지만 나 혼자 속으로 뜨끔했다. 회사에서 진짜 착한 사람은 ‘쟤 착하다.’라는 말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잘 처리해 줘서 나의 일을 덜어주는 일머리 있는 사람을 뜻한다는데, 난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의 경우에 해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보다 몇 배는 더 회사 생활을 한 선배는 내게 종종 이런저런 조언을 하곤 했는데, 그중에는 이 착한 사람에 관한 말도 섞여 있었다. 착하다는 말은 사실 칭찬이 아니라는 말도 그에게서 들은 거였다. 그가 그런 조언을 왜 했는지 이제는 납득이 된다.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중의 하나는 ‘착하다’는 형용사 안에 갇혀 온갖 사람들의 부탁과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 나를 구하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회사에서 소위 말하는 짬밥을 오래 먹다 보면 알게 모르게 그 조직의 문화를 내면화하게 된다. 수평적이거나 수직적이거나, 자유롭거나 경직되거나, 그리고 어떤 사람에게 어떻게 부탁해야 내가 더 편해질 수 있는지를 알게 된다. 회사원도 인간인지라 메시지를 보냈을 때 느낌표가 붙은 답이 돌아오는 사람, 전화를 걸었을 때 차근차근 내게 설명해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 더 편한 법이다. 나 역시 말 붙이기조차 어려운 무뚝뚝한 사람보다는 하나라도 더 알아봐 주려고 하는 사람에게 연락을 하게 된다. 그도 바쁘고 힘들고 짜증 날 수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어떡해, 하면서 조직도에서 가장 인상이 좋아 보이는 사람을 마치 관상가처럼 점찍은 뒤 그에게 전화를 건다.
그에 대한 보답이라고나 할까, 나는 그래서 친절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친절하다와 착하다가 동의어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나는 먼 부서에서 날아온 낯선 메시지에 이모티콘을 붙여 답장하고, 전화를 걸어오는 사람에게 마치 오래전에 만났던 반가운 친구처럼 인사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쟤는 일도 못하면서 이모티콘 붙이고 인사만 더 하면 되는 줄 아나 봐? 그렇다면 그 말이 맞다. 일을 잘하고 못하고는 내가 지금 당장 바꿀 수 없는 것이지만, 상냥한 목소리와 부드러운 목소리 정도는 마음만 먹으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 선배의 말처럼 나의 인사와 웃음 따위는 누군가에게 전혀 도움이 안 될 수 있다. 원하는 대로 착착 일을 해주고, 때로는 누군가의 실수를 살짝 눈감아주는 센스가 어쩌면 내게 가장 필요할지도 모른다. 한편으로는 내가 소위 만만하다(?)는 이유로 조직도에서 내 얼굴을 찾아낸 사람들로 인해 내가 더 귀찮아졌거나 억울해졌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니까 정말 그럼에도, 누군가의 하루를 내가 망치지 않을 정도의 친절과 다정함이라면 나는 기꺼이 약간의 귀찮음과 억울함을 감수하려 한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은 망망대해처럼 깊고 아득하여 도무지 들여다볼 수 없기도 하지만, 그렇기에 부드러운 바람 한 조각만으로도 그 표면에 이는 사나운 파도를 잠재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 이쯤 되면 이 글의 제목이 왜 '냉동 김밥 실종기'인지 궁금할 것이다. 아, 벌써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잊었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이제부터 '냉동 김밥 실종 사건'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자고로 여름이란 다이어트-를 다짐하고 실패하는-의 계절이라고 한다. 밥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그 계절이 참 곤혹스러운데, 마침 속세(?)의 맛이 나는 곤약 김밥을 냉동으로 배송해 준다고 해서 바로 결제를 했다. 김밥 4개가 한 묶음이고 그것을 다음날 새벽에 배송해 준다고 했다. 새벽 배송까지는 필요 없는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날씨가 무더우니 새벽에 오면 출근길에 냉동실에 넣어 정리하면 되겠다 싶어 내심 기다렸다.
새벽 배송을 받아보는 건 처음이라 기사님이 언제쯤 오시려나 하고 기다렸지만 끝내 내 출근 시간까지 오시지 않았고, 나는 결국 언젠가 도착할 나의 김밥을 뒤로 한 채 일터로 향했다. 그리고 집에 갈 생각에 부풀어 있는 오후 4시 언저리, 택배가 집 문 앞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오후 4시면 김밥의 무사 여부를 장담하기 어려운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에 삼겹살을 사주시겠다는 선배의 유혹을 뿌리치고 나는 내 김밥을 사수하러 칼퇴를 했다. 집이 보이는 계단에 올라섰는데 어째 내가 기다렸던 아이스박스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 집 호수를 기사님이 착각하셨나 싶어 옆집을 기웃거렸지만 그 어디에도 김밥은 보이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내게 문자를 보냈던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더운 날씨에 내 김밥이 상하면 어쩌나 싶어 갑자기 짜증이 확 솟았다. 더군다나 기사님은 전화를 받지도 않았다. 내 김밥 진짜 어디 가서 녹고 있는 거 아냐?
불통인 전화를 붙들고 점점 화가 난 데다 택배 박스를 찾으러 여기저기 기웃거린 탓에 몸에는 땀이 삐질삐질 나고 있어 나는 불쾌함으로 가득 차버렸다. 기사님께 문자를 남겨 내 김밥이 사라졌음을 알렸다. 기사님이 나 몰라라 하면 그때부턴 이미 결제한 이 김밥은 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때 문자를 보냈던 그 번호로 전화가 왔다. 순간 감정이 실린 채로 마치 내가 갑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보세요?' 하는 소리가 억세게 나왔다. 내 목소리를 들으셨는지 알 수 없지만, 기사님은 마치 울상인 표정이 보일 것처럼 연신 죄송하다는 말씀을 계속하셨다. 정말 죄송한데 옆 건물에 잘못 갖다 둔 것 같다고 본인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말씀이셨다. '그럼 어떡해요?' 하고 답답한 마음에 다시 물었는데, 기사님은 혹시 상품을 찾으러 직접 가실 수 있는지 내게 물어보셨다. 그 순간 나는 바로 옆 건물에 갔다 오면 되지만 기사님은 이미 몇 시간 전에 배송이 끝난 이 지역에 다시 차를 끌고 오셔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머리 한구석에 피어오르자 동시에 짜증이 가셨다. "네, 알겠어요!" 하고 대답하고 기사님의 죄송하다는 끝없는 사과에 "정말 괜찮아요."라고 웃으며 답해준 뒤 전화를 끊었다. 사실 옆 건물에 가서 내 김밥을 찾아오는 건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기사님이 배송 실수를 한 것도 맞고, 기사님과 빨리 연락이 닿지 않았다면 내 김밥은 모조리 상했거나 세상 어딘가를 떠돌고 있었을 거다. 내 잘못이 없었고 거기에다 결과적으로 잘 해결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나는 이 냉동 김밥 실종 사건을 겪으며 또 한 번 나의 말 한마디와 순간의 태도가 가진 힘을 떠올렸다. 내가 만약 기사님께 화를 내고 윽박질렀다면 어땠을까? 기사님은 그날 있었던 기쁘고 좋은 일들은 잊어버린 채 나와의 사이에 있었던 불쾌한 언쟁만을 기억하며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기사님께 보여 드렸던 아주 작은 친절은 그에게는 기억도 하지 못할 찰나에 불과하겠지만, 내가 그의 찰나를 망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내 친절은 충분한 값을 받았다.
오늘 하루, 당신을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사람 중 단 한 명에게라도 한 번 더 웃어주고 한 번 더 상냥하게 말해보기 바란다. 누군가는 당신의 그 웃음과 미소 덕분에 '오늘 하루 꽤 괜찮았어.'라고 말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