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드림카
작년 연말, 메뉴에 단백질은 없고 탄수화물만 가득한 구내식당에 완전히 질려버린 나는 운전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사무직 동기 중에 차가 있는 사람이 없으니 내가 차를 사서 점심 때 동기들을 태우고 밖에 나가서 밥을 먹고 오겠다는 생각이었다.(내가 다니던 회사는 고립되어 있어서 차가 없으면 나가서 밥을 먹을 수 없었다) 밥 때문에 차를 산다고? 싶겠지만 나한테 밥은 정말 중요한 문제다. 그때는 퇴사 생각도 없었으니 앞으로 30년을 계속 구내식당 밥만 먹어야 한다는 게 너무나 끔찍했다.
나는 장비병이 있는 사람이라 무엇을 시작하려고 하면 괜찮은 장비부터 알아본다. 그래서 면허는 없지만 차부터 알아보았다. 사회초년생이니 당연히 예산이 부족하고 초보운전이니 여기저기 긁힐 게 뻔해서 연식이 오래된 중고차 위주로 알아보았지만 딱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중고차 사이트에 올라온 차들은 대부분 안전 옵션이 없다는 것.
차가 여기저기 긁히더라도 운전하다가 죽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아니 내가 누굴 죽이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안전 옵션이 없으니 초보인(정확히는 운전학원도 등록 전이었던) 나는 너무나 불안했다. 그래서 당시 내가 가진 여윳돈이었던 2천만원으로 살 수 있는 차를 알아보았다.
그때 내 2천만원 예산에 딱 맞아떨어지는 차가 풀옵션까지는 아니고 적당히 옵션을 추가한 캐스퍼였다. 안전 옵션을 넣을 수 있는데 경차라 취등록세 감면도 되고 디자인도 귀엽고 예산도 딱 맞고... 나는 캐스퍼에 제대로 꽂혀버렸다. 그래서 차부터 골라놓고 운전학원에 등록했다. 운전에 재능이 전혀 없는데 어찌저찌 운좋게 한번에 합격하여 면허증을 손에 넣었지만 결국 캐스퍼는 사지 못했다. 기능시험을 보기 직전에 현타가 제대로 와버렸기 때문이다.
2천만원을 주고 캐스퍼를 산다는 것은, 내 집마련이 그만큼 늦어진다는 것이고, 내 여윳돈은 다시 0원이 된다는 건데, 그럼 나는 어느 세월에 이 좁은 원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벌이가 좀 괜찮았으면 2000만원을 다시 모으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텐데, 아니지 내가 그냥 이 직장에 다니지 않으면 점심을 나가서 먹겠다는 이유로 차를 구매할 필요가 없는데, 그냥 월급 많이 주고 고립되어 있지 않은 직장으로 옮기면 되잖아? 라는 생각이 들고 나니 흥이 팍 식어버렸다.
그래서 면허만 따고 캐스퍼는 구매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캐스퍼를 향한 나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나는 원래 길거리에 지나가는 차를 봐도 아빠차 말고는 못 알아보는 사람이었는데, 캐스퍼는 이제 기가 막히게 알아본다. 캐스퍼만 보이면 저 차는 어떤 옵션을 추가했나 하고 유심히 보게 된다.
퇴사를 하고 다시 본가 아파트로 돌아왔다. 분명 2년 전에는 없었는데, 주차장에 못 보던 캐스퍼가 한 대 추가되어 있었다. 처음 아파트 주차장에서 카키색 캐스퍼를 발견한 날 속으로 생각했다. 퇴사를 하지 않은 평행세계의 나는 지금쯤 아이보리색 캐스퍼에 동기들을 태우고 점심을 먹으러 다닐까? 엄마차를 얻어타고 스터디카페를 왔다갔다 하고 있는 나를 안타깝게 볼지도 모르겠네. 그렇지만 2년 뒤엔 전세가 역전되어 있을 테니 두고봐라 이 현실에 안주해버린 쫄보녀석아! 하면서.
요즘도 종종 스터디카페에서 돌아오는 길에 캐스퍼를 발견한다. 다른 차는 하나도 안 보이는데 캐스퍼만 잘 보이는 게 너무 신기해. 뒷모습이 유난히 귀여운 나의 드림카 캐스퍼야. 내가 만약 운전을 하게 된다면 꼭 너를 선택할게. 돈 많이 벌어서 풀옵션으로 뽑아줄게.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리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