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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비버 Oct 23. 2024

[롱울] 지금도 경유 중입니다

다음에 향하는 곳은 또 다른 경유지일까 아니면 목적지일까

대학생 때의 일이다. 졸업을 앞두고 학과 사무실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  이번 학과 졸업식에서 학생 대표로 졸업 연설을 부탁드리려고 하는데요.

―  …… 네?


예상치 못한 행운이 찾아왔을 때 나는,


―  말씀은 정말 감사한데, 제가 졸업 연설을 해도 괜찮을까요?


그 행운이 내 몫이 맞는지, 나에게 자격이 있는지부터 조심스럽게 확인하고 있었다.


단지 졸업 학점이 높다는 이유로 졸업생 대표로 선발되는 게 맞는 걸까? 하는 의문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함께 졸업하는 교우들이 대부분 선배인 상황이 무겁게 다가왔다. 나보다 더 많이 경험하고, 더 치열하게 고민했을 사람들 앞에서, 그저 학교만 열심히 다닌 우물 안 개구리가 으스대는 꼴이면 어떡하지.


하지만 교직원 선생님은 학생을 대하는 데 능숙한 분이었고, 내가 느낀 부담감을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충분히 대화를 나눈 덕분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채로 나에게 찾아온 행운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었다.


이후 지난 졸업 연설문을 메일로 받아 보았다. A4 한 장이 채 되지 않는 짧은 분량. 그중 정형화된 양식을 제외하면 나에게 할애된 공간은 두 문단 남짓이었다. 이 공간에 어떤 글을 써 내려가면 좋을까. 전공과 졸업 시기가 같다는 이유로 우연히 한자리에 모인 우리를 아우를 수 있는 이야기가 무엇일까.


같은 점보다 다른 점을 찾기가 더 쉬운 우리들이었다. 졸업 이후의 거처가 정해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대학 시절이 완만한 언덕이었던 사람도, 벼랑 끝이었던 사람도 한 공간에 있는 졸업식. 처한 상황이 저마다 다른데, 그럼에도 내 시야가 좁은 탓에 단순히 내 입장만 대변한 소감문이 나오진 않을까 염려되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이야기의 방향을 우리 모두에게 다가오지 않은 미래로 돌리기로 했다. 자세한 사정은 몰라도 우리는 예비 사회인이라는 공통된 정체성을 공유하고 있었으니까. 사회로 진입하기 전, 누구나 마음 한편에 두려움 하나쯤은 키우고 있겠지. 대학교라는 익숙한 공간을 떠나 다시 처음부터 서툴게 시작해야 하는 우리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이거였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앞으로 마주하게 될 사회가 늘 순탄치만은 않겠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감 잃지 않고 지금처럼 빛나길 응원하겠습니다."


사실 졸업 연설문을 쓸 당시만 해도 나는 졸업 이후의 진로가 명확히 정해져 있었다. 그러니 내 연설문에는, 대학생의 가장 큰 숙제인 진로 고민을 끝낸 것에 대한 자신감이 배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 만약 졸업 연설문을 다시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A4 한 장으로 응축하는 데 꽤나 고생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졸업식 현장에서 만담회를 열었을 수도 있다. 그때 그 자리에서 서로의 시작을 응원했던 우리들에게, 이제는 하고 싶은 말보다 듣고 싶은 이야기가 훨씬 많으니까.


요즘 어떻게 지내요?

지금 하고 계신 일은 적성에 잘 맞나요?

그때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졸업을 받아들인 건가요?

지금 당신의 삶은 졸업식 날 기대했던 모습과 얼마나 일치하나요?


서른이 되면 일상이 단조롭고 평온하다 못해 조금은 무료하기까지 할 줄 알았는데, 나는 몇 차례의 방황을 뒤로하고 또다시 변화를 준비하고 있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감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내 말을, 정작 나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다. 내 자리가 과연 여기가 맞는지 나조차도 여전히 불확실하며, 자신감은 면접장에서 내 몸집을 잠시 그럴싸하게 부풀릴 때나 찾는 단어가 되었다.


당연하게만 여겼던 사회로의 진입이, 지금은 정해진 끝이 없는 길 찾기로 느껴진다. 길을 다 찾았다고 안심하는 순간, 언제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재진입을 준비할 수 있는 무기한 인생 과제.


그래서 이제는 생각을 바꿔 스스로의 상태를 경유(經由)로 정의하기로 했다.


말하자면 나는 지금 경유 중이다. 목적지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잠시 머물다가 떠나기를 반복하는 경유 상태. 그러니 경유지 하나 더 추가된다고 해서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질 건 없다. 기껏해야 도착 예정 시간만 조금 늘어날 뿐, 길은 사라지지 않을 테니. 만약 처음부터 목적지를 알았더라면 곧장 갈 수 있었을 테지만, 경유지를 거쳐야 하는 이상 내가 가는 지금 이 길이 결국 나에게는 최단 경로인 셈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 찾기를 과연 내 손으로 매듭짓는 날이 올까. 경유지로 여겼던 곳이 어쩌면 내가 찾아 헤매던 목적지일 수도 있고, 나이가 들어 현실적인 이유로 마지막 경유지에 그대로 정착할 수도 있다.


그러니 더욱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내가 무엇을 까다롭게 견디지 못하는지, 무엇에 뾰족하게 강점이 있는지 나를 더 알게 된 지금, 이제는 내가 나아가려는 길에 대한 실마리를 잡고 싶다. 그래서 나는 경유지에 머물며 다음을 위해 준비한다. 다음에 향하는 곳은 역시 또 다른 경유지일까 아니면 목적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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