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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장에 햇살을 채우면
13화
이주와 모자, 소파가 있는 환대 이야기
24.08.22 17:18 씀
by
프로이데 전주현
Aug 23. 2024
집 떠나온 이
가 길고 뾰족한 모자를
썼
어
그는 피난처의
중심부를 향해
걸었지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말했
지
무겁지 않을까
끄트머리에 찔릴 것만 같군
처음 보는 디자인이야
기괴한 것 같기도
한창 떠들다가 결론을 내렸어
"저 모자가 바로 저 사람의 정체성이군"
집 떠나온 이는 밤낮으로 걸었어
걸으면서
졸기도 했는데 그때 그의 모습은 창을 든 기마병 같았지
고개를 떨군 탓에 하늘을 향해 솟아 있던 길고 뾰족한 모자가 수평선 쪽으로 푹 꺼
졌
던
거야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말했지
아 깜짝아
잘 때 걷더라도 모자는 벗지 그래
굳이 저렇게 까지 해서 어딜 가려는 거야
모자가 벗겨지진 않네 신기하다
한창 떠들다가 결론을 내렸어
"저 모자가 바로 저 사람의 정체성이군"
어느 날 피난처에 편지가 하나 도착했어
집 떠나온 이가 보낸 거였지
- 곧 가겠습니다 -
피난처는 분주
히 손님 맞을 준비를 시작했어
중심부에 놓을 소파
부터 새로 주문했지
앉거나 누울 이을 그대로 받쳐주고
후루룩 마시기 좋은 캐모마일 차의 온도를
담은
푹신한 소파였어
집 떠나온 이에겐 최적의 선물이었지
그리고 어느 날
- 똑 똑 똑 -
집 떠나온 이가 피난처 문을 두드렸어
길고 뾰족한 모자도 함께였지
피난처는 창문과 대문을 활짝 열어젖히며 그를 반겼어
모자를 받아주려고 손을 건넸지 그러자 그가 한 발짝 물러섰어
- 괜찮습니다 -
피난처는 머쓱했지만 마땅히 해야 할 일을 계속했어
그를 위해 준비한 소파를 보여주었지
편히 쉬라는 인사도 빼먹질 않았
고 웃으면서 자리를 비켜주었지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말했지
모자 정도는 벗어도 괜찮지 않나
무례하기도 하지
시간이 좀 더 필요한 걸지도 몰라
쑥스러운가 보지
한창 떠들다가 결론을 내렸어
"저 모자가 바로 저 사람의 정체성이군"
피난처는 기다리기로 했어
자신에게 온 사람들마다 사연이 다르다는 걸 알았거든
사연이 다르면 시간 법칙도 달랐어 누구에겐 1분이 1분 그대로 흘렀고 다른 이에겐 1분이 3초 같았고 그 옆에 있는 사람에겐 1분이 1시간 같았거든
많이 보았어 자신이 준비한 소파 위에 앉거나 누워 있으면서도 똑 소리를 내지 못하는 이들을
그래서 피난처는 기다리기로 했어
똑 소리
가
무어냐고
관절 인형 있지 마디마디 사람처럼 움직이는 그거
그
관절들의 연결점들을
떠올려 봐
한쪽은 툭 튀어나와 있고 한쪽은 툭 튀어나온 무언가를 감싸는 구조로 되어 있지
그러니까 한쪽은 들이밀고 한쪽은 받아주고
소켓이라
고
나 할까
피난처를 찾아오는 쪽은 들이밀어
그가 쓴 툭 모자처럼 길고 뾰족한 것을
그때 피난처는 그걸 안아줘
안락하고 푹신한 소파로
그리고 다시 기다려 똑 소리가 날 때까지
양 쪽이 서로를 온전히 받아들였기를 하면서
집 떠나온 이들은 철저히 소파 위에서 생활하거든
거기서
앉아 있다가 자기도 하거든
그러다 몸을 뒤척일 때
- 똑 -
툭 튀어나와 있던
걸
부러뜨리고 말거든
그렇게나 뾰족한 걸 폭신한 것 안에서 부숴버리거든
똑 소리는 불시에 찾아와
똑 소리는 자애롭
게
웃어
똑 소리는 외국어를 어설프게 읊고
똑 소리는 인스턴트 라면을 자주 끓어
그즈음,
피난처는 목에 두른 타올로 이마 위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똑 소리
가 났다는 걸 기가 막히게 알아차려
그리고 박수를
쳐
가까스로 주파수를 맞춘 라디오 방송을
들었다는 듯이 묵직하고 명쾌히 웃어
이야 드디어 해냈구나 하고서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말하지
축하해요
사람은 역시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해낼 줄 알았어요
신이시여
한창 떠들다가 길을 잃어버리지
"그런데 저 모자가 뭐였더라?"
똑 소리 이후 시간이 꽤 흘렀어
집 떠나온 이의
머리는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지
툭
튀어나와 있던 부분은 꽤 뭉툭해졌어
부분 부분 깊게 파인 곳도 보이고
그런 그를 피난처
가
찾아왔어
수제 쿠키까지 들고서 점검을 나온 셈이지
똑 소리 이후에도 잘 지내고 있는지
어디 보자 조금만 더 있으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겠는걸요
- 더 큰 일이라는 건 툭 튀어나와 있는 것을
맞
이하는 거였지
집 떠나온 이가 결국 피난처가 되고 피난처의 중심인 소파를 주문하는 거였어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말했지
이제 이방인 티는 벗었군 그래
잘 지내고 있는 거 같아
멋진 일이 생길 거야
역사는 계속된다
한창 떠들다가 결론을 내렸어
"저 뭉툭한 게 그 사람의 정체성이군"
다음 날 피난처에 편지가 한 통 도착
했
어
- 곧 가겠습니다 -
피난처는 씩 웃으며 그가 앉은 쪽을 바라봤어
그리고 이렇게 말했지
소파를 준비할 시간이야
keyword
적응
정체성
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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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음지기의 쓰는 사람. 독일어 강사이자 문장 수집가, 스크랩북 메이커. 라디오와 함께 하는 일상과 평생 외국어를 공부하는 인생을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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