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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델 뭐 하러 오냐

2차 폭발 위기

by 프로이데 전주현

빵빵해진 배를 두들기며 슈리성 공영주차장으로 되돌아갔다. 점심 먹기 전 슈리성에서 식당까지 걸어갈 땐 그렇게 머나먼 길 같더니, 배 부르고 걷는 길은 짧고 선선하기까지 했다. 슈리성에서 일본 이전의 모습, 류큐 왕국을 보았으니, 그다음은 일본 이후, 오키나와로서 제2차 세계대전 겪은 섬을 만날 차례였다. 우리는 섬의 남쪽으로 향했다. 평화를 꿈꾸는 사람들이 모여산다는 이토만, 그곳은 과거 제2차 세계대전의 최대 격전지였다.


오키나와 평화 기념 공원: 정식 이름은 오키나와 전적 국립공원. 일본에 있는 국립공원 중 유일한 전적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오키나와 일본군 총사령부가 있던 곳. 1945년 3월 26일 시작한 오키나와 전투는 6월 23일에 종결되었다. 태평양 전쟁 최대의 전투로 양측 사망자가 엄청나다. 거의 20만 명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 그중 민간인 사망자만 9만 4000명에 달했다. 미군 점령기간 동안에는 류큐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나 일본으로 반환 후에는 국립공원으로 승격되었다. 여름에서 가을 동안 일본엔 고교생의 수학여행 필수 방문지 중 하나다. - <리얼 오키나와> 143-144쪽


전쟁의 흔적을 만지고 상처의 공간을 걷는 건 독일어와 유럽연합을 공부한 내겐 숙제와 같았다. 인간성, 다툼, 전쟁, 갈등, 화해, 상처 봉합, 보상 심리, 죄의식, 정체성 등... 좀처럼 쉽게 정의 내리기 힘든 개념들이 유럽을 공부하는 내내 툭툭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때문에 남들보다는 비교적 자연스레 다크 투어리즘이라고 호평과 혹평을 동시에 받는 공간들을 방문했다. 이를테면 폴란드의 오시비엥침(아우슈비츠) 수용소나 벨기에 이에페르(Ypres) 전쟁터와 박물관, 연합군/독일군 묘지, 독일 뉘른베르크의 나치 전당대회장, 도시 그 자체가 역사박물관인 독일 베를린 등...


그때마다 마음이 꿈틀거렸는데, 그 움직임이 불편했지만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과거와 현재는 끝없이 서로를 매만지고 있으니까. 우리는 그 사이에 얽히고설켜 사는 인간이니까. 상처의 흔적을 볼 수 있다면 봐야 한다고. 인간이 인간에게 행한 폭력을 마주하는 건 한계를 느끼게 했다. '이래서 인간이구나. 인간이 그렇지, ' 하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체념을 닮은 그 마음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배워야 한다고. 나의 한계를 잊지 않고,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회복하기 위해서.'


이런 마음으로 여행 셋째 날, 새로운 숙소 체크인과 렌터카 반납 직전에 오키나와 평화 공원 방문을 계획했다. 어쩌면 오키나와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면서(우리가 일본의 역사 교과서 개정 문제에 핏대를 세우는 것처럼, 오키나와 사람들도 해당 이슈를 예의주시한다. 일본 제국주의 전쟁의 피해자라는 인식이 오키나와 사람들에게도 깊게 뿌리내리고 있기에). 전투 희생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평화의 초석에서 제대로 읽을 줄 모르지만, (태평양 전쟁 당시엔 분단되어 있지 않았으니까) 조선인이라며 하나로 분류되어 있는 한반도 사람들의 이름을 어루만지는 상상도 했다. 추모와 배움의 시간을 앞두고 표정도 마음도 꽤 진지해졌다.



그런데 하필, 이때 사자가 다시 힐링을 운운하기 시작했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피곤하니까 숙소에 체크인해서 '힐링'을 하자는 게 아닌가. 도대체 사자가 생각하는 힐링은 뭐란 말이지. 여기까지 와서 평화 공원도 안 가보고 온천이나 즐기자는 건가. 마음이 스멀스멀 뾰족해졌다. '그래도 막상 가시면 좋아하시겠지.' 꾹 참고서 노린재 뒷좌석을 지켰다. 그러는 사이 평화 기념 공원에 도착했다. 비수기라 그런가 방문객이 거의 보이질 않았다. 안 그래도 큰 공원인데 더 커 보였다.


평화의 초석 뒤편으로 탁 트인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포탄을 떠올리게 하는 자그마한 분수는 아무 장식 없이 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오키나와 평화 기념 공원도 기타 다크 투어리즘과 추모 현장처럼, 과거의 피냄새가 무색하게도 상처의 뭉툭한 단면을 고요한 풍경 속에 내보이고 있었다. '이렇게 맑고 드넓은 바다가 펼쳐진 곳에 포탄 소리가 가득하고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었다니.'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고, 기도 말고는 답이 없었다. 비극적 이게도 아직도 전쟁이 있어요, 아직도 다툼이 많아요, 하고서.


모두 각자 방식으로 짧게 기도를 드렸다. 사자도 시어머니 옆에서 잠깐 합장을 했다. 나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초석들을 살폈다.


사자는 기도를 마쳤는지 바닷바람을 한없이 맞으며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을 해버렸다.


"이런 델 뭐 하러 오냐 했는데..."


말의 끝은 긍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말의 시작에 꽂혔고 2차 폭발 위기를 맞았다. 앞말, 전제 조건이 없었더라면 성립이 불가능한 게 뒷말 아니던가. 앞말 때문에 뒷말의 무게가 가벼워질 수도 있지 않은가. "너무 건강식이네, "에서도 건강식보단 너무에 방점이 찍혔던 것처럼. 좋게 좋게 가자고 마음먹던 게 또 흐트러지려고 했다. 사자의 그 말 이후로 나는 팔짱을 끼고서 말을 아꼈다. '그래도 싸울 순 없잖아. 내가 온몸으로 문을 닫고 있으면 괜찮겠지. 실수를 하는 것보단 그게 나아.' 그런데 남편 눈엔 그게 바로 보였나 보다.


뒤이어 공원 내 한국인 위령탑을 들렀던 우리는, "화장실 좀 갔다가 가자"는 사자의 말에 평화 기념 자료관 건물에 잠깐 들어섰다. 원래대로였더라면 입장료를 내고 구경했을 건물이었다. 남편이 조심스레 물었다.


"여기까지 왔는데 전시관 안 보고 가도 되겠어?"


남편은 여행 계획을 함께 한 사람이었기에, 내가 평화 공원에 관한 다큐멘터리로 볼 때 전시관을 얼마나 궁금해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부터 입이 툭 튀어나와서는 별 말 않는 나를 보고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읽은 모양이었다. 내 마음을 알아차려주고 다독여준 게 정말 고마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기서 태세를 바꿔서 "그래, 보고 가자!"라고 말하기엔 마음이 이미 너무 뾰족해져 있었다.


"나한테 묻지 마." 나는 대답했다.


사자가 화장실을 다녀왔다. 자료관 문턱을 코 앞에 두고서 나는 팸플릿 하나만 챙겨 나왔다. 어제저녁에 마음에 새겼던 단어가 다시 등장했다.


'할머니.......'

스트라이크 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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