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링페이퍼 사건으로 폭발해 버렸던 어젠 하늘이 그렇게 요란스럽게 굴더니, 오늘은 다행히 흐리기만 할 뿐 천둥, 번개, 비의 기운이 쏙 들어갔다. 하늘도 집 가는 길은 막지 않으려나보다 싶었다.
'다행이지 뭐.'
집 가는 길은 편했다. 여권을 펼칠 때가 정해져 있었고동행과 대화를 나눌 일도 적었다(아무래도 피곤했으니). 게다가 사자에게 삼진아웃을 선언한 그다음 날이어서 '내려놓음'이 잘 되었다(될 대로 되라지).
숙소에서 나하 공항까지 버스가 운행해서 편하게 움직였다. 개인행동에 능한 거 누가 모를까 봐, 공항 가는 버스에 자리를 잡을 때도 사자는 혼자 따로 운전석 바로 뒤에 앉았다. 시어머니와 남편, 나 이렇게 셋은 넓게 앉기 좋은 버스 중앙에 앉았는데 한 번을 돌아보질 않았다(그래놓고 뭐 본인이 어머니의 보좌관이라는 건지).
공항에서 수하물을 부치자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남은 일정은 면세점 쇼핑과 게이트 앞에서 대기하는 것뿐. 출국일, 일본 공항에서 살 것으론 간식이 최고였다.유명한 오키나와 식재료가 많아서 그런지, 간식 종류도 다양했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자색 고구마 타르트를 고르고, 산호초로 이용해 블랜딩을 했다는 드립백 커피도 장바구니에 담고, 오키나와 산 견과류로 만든 강정을 집었다. 시어머니께서도 내가 사는 걸 옆에서 보시더니 "나도 하나, " 하면서 따라 담으셨다. 남편은 직장 동료들과 나눠 먹으려고 흑당 쿠키와 타르트를 골랐다.
그동안 사자는 무얼 했냐고? 갑자기 웬 인강을 들어야 한다고 바쁘다는 표정을 지으시길래 수하물 체크인하는 곳 앞에 앉아계시라고 했다. 와이파이 도시락을 쥐어드리고 편히 개인행동을 하시라고 자리를 비켜드렸다.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집에 갈 거니까.
남편이 게이트 앞으로 이동하자고 사자에게 말했을 때도, 사자는 앉은자리에서 꿈쩍도 않고 인강 화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그러시든가.' 결국, 시어머니와 남편, 나 이렇게 셋 먼저 출국 수속을 밟았다. 사자는 나중에 인강을 다 듣고 나서 홀로 게이트 앞까지 왔다.
게이트 앞에 넓게 앉았다. 하늘에 몸을 싣기 전, 일상으로의 복귀를 준비하는 그 시간이 참 고요했다. 일기장을 펼쳐 오늘의 지출 내역과 여행 일지를 기록하고 지난날을 되돌아보면서 귀국 후 일정을 점검했다. 여행 중 찍었던 사진까지 일자와 주제별로 정리해 클라우드에 올려두어 가족 모두가 편히 볼 수 있도록 전시해 두었다. 여행이 끝나가는 게 실감이 났다.
뒷좌석에 사자가 앉는 소리가 났다. 남편은 내 기분을 맞춰준답시고 퉁명스럽게 사자를 맞이했다. 아들의 태도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웬일로 사자가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추측하건대, 시어머니께서 약간 언질을 주신 것 같았다.
"아들!"
"네."
"아드을!"
"아빠, 왜 같이 가자고 할 때 안 따라오시고 그래요?"
"아니, 나 혼자도 잘할 수 있으니까 그랬지."
"아빠 그렇게 혼자서도 잘 다니실 수 있으면 앞으로 혼자 다니시고요. 엄마는 혼자 못 다닌다고 했으니까 우리가 같이 다니면 되겠다, 그죠?"
"아니이, 에이, 미안하다."
나는 뒤를 돌아 사자를 관찰했다.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는 벗고, 하와이안 티셔츠는 그대로 입고서, 눈은 차마 마주치지 못하고, 땅을 한없이 바라보면서, 한쪽 손으로 허벅지를 반복해서 쓸어내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꼭 부끄럽거나 쑥스러울 때, 허벅지를 저렇게 만지시더라.'
사자는 약간 풀이 죽어서 아들에게 성내지 말아 달라고 몸을 배배 꼬고 계셨다. 여행 전야에 치킨을 시켜 놓고 의치를 빼야 했을 때 안절부절못하시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난감해하실 때마다 꿈틀거리는 동작이 격렬해지는군.'
사람 마음이참 묘한 게, 분명 삼진 아웃을 외친 상황이었는데, 게이트 앞에서 쭈구리는 사자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측은해 보셨다. 사자의 언행 중에 거슬리는 것이 많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사자를 미워하진 않는다고 생각이 들었다.
인천공항에 무사히 도착했다. 시부모님께선 공항에서 목포로 바로 가는 편이 낫다며 고속버스 매표를 서두르셨다. 그 때문에 배웅하려는 나와 남편도 괜히 버스 정류장까지 질주를 했다. 다행히 버스 출발 5-10분 전에 정류장에 도착했다. 우리는 마주 서서 안녕을 고했다.
헤어질 때가 되어서야 나는 사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평소처럼 헤실헤실 웃고 계셨다. 돌려차기를 하고 싶어졌다. 삼진아웃이었으니까. 나는 사자를 살짝 째려보다가 말했다.
"아버진 참 복합적인 사람이에요."
사자는 그저 웃었다. 시어머니가 사자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그거 좋은 말 아니야."
그러거나 말거나 사자는 의치 두 개를 낀 이를 환히 보이며 말했다.
"고맙다. 가서 쉬어라!"
아 정말.
앞으로도 사자 때문에 폭발하는 일이 많을 것 같다. 그렇지만 끝내 사자를 미워할 순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