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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 EZ Jul 26. 2023

7. 산속으로 은둔한 붓다의 세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산사

 한국인들의 문화와 생활에 스리슬쩍 끼얹어있는 불교의 영향과는 다르게, 실제로 불교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사찰이나 그 생활을 보여주는 수도자들을 도시내에서 보기는 힘들다. 그런데 2018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한국의 산사와 서원이 등재되었다. 외국인을 대상으로 가이드를 하는 관광통역안내사에게 한 번의 술렁임이 있었는데, 휴양지로 적합하지 않은 한국에서 다른 각도로 관광객을 끌 수 있는 여행지가 하나 추가되었다는 희망 때문이었다. 하지만 서양의 성당 등과는 달리 산사와 서원은 접근성이 그다지 좋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어 규모가 큰 사찰 이외에는 아는 사람이 아니면 가기가 힘든 여행지가 되곤한다.

충북 단양에 위치한 천태종 구인사

 불교인들이 성지순례로 가는 인접 국가들의 사찰과도 꽤 다른 분위기이다. 동남아에는 국교가 아직도 불교인 나라들이 많은데, 한국의 사찰과 비교해 보면 확연히 차이가 드러난다. 한국의 대부분 사찰은 산속에 위치해 있고, 규모가 큰 사찰일수록 그러하다. 비록 사찰이 위치한 산이 꽃이나 낙엽으로 이름이 있어 철마다 사람들이 붐벼 자연스럽게 사찰에 사람이 많아질지라도 경내로 들어가면 자연히 사람들이 조용해진다. 대체로 수행의 의미가 큰 공간이라 홀로, 혹은 소규모의 사람들이 방문하거나 대규모라도 작은 그룹으로 나누어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한 곳이다. 그래서 가이드들이 생각하는 소위 팔리는 대규모의 관광과 한국 사찰은 그다지 맞지 않는다.

 반면 동남아의 사찰들은 도심 내 평지에 위치해 있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것은 사찰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주요 종교시설들은 다 비슷하다. 여행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면 모든 종교시설은 사람들이 접근하기 좋은 시가지에 위치해 있다. 혹시 붓다가 산속에 사찰을 지으라고 했는가 의문이 들지만, 그 역시 초기 경전에서 사원의 위치를 도시에서 멀지 않은 한적한 공간에 지으라고 했다. 사람들이 방문하기 좋지만, 수행에 방해하지 않은 만큼 약간만 떨어진 공간을 추천했다. 하지만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약 1000년간 불교가 한반도의 국교라고 주장하는 것에 비해 종교시설이 접근이 어려운 곳에 있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그렇다면 왜 유독 한국의 사찰은 산속에 위치해 있을까?

태국 치앙마이 왓 쩨디 루앙 사원

 최근 코로나로 해외에 나가지 못하면서 국내여행이 아름아름 활성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그중에 SNS에서 많이 태그 되는 여행지 중 하나가 경주였다. 안압지 등이 수학여행 여행지로 원래도 유명했지만, 근래에는 황리단 길과 신라의 왕릉 등도 포토스팟으로 한몫을 한다. 그리고 경주를 여행하며 흐드러진 벚꽃나무 아래서 불국사의 쌍사자 석등과 함께 사진을 찍은 것도 많은 한국인들의 학창 시절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추억이다. 자주가는 불국사는 산중에 위치해 있어 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버스를 타고 불국사로 가는 어느 길, 친구와 수다를 떨면서 이동하여 황룡사에 잠시 내려 빈 터를 보는 기억은 그다지 크게 남아있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은 터만 남은 경주 시내 한가운데 신라를 대표하는 사찰이 있었으며, 시가지 한가운데에 80m가 넘는 9층 목탑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은 쉽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이는 비단 경주뿐이 아니다. 신라에 황룡사가 있다면 백제엔 그에 버금가는 미륵사가 있었는데 미륵사는 지금의 익산시청과 도보로 1시간도 걸리지 않는 배산임수의 풍수에 위치해 있다. 이 또한 지금 터만 남아있었다. 고려시대의 최대 사찰이었던 양주의 회암사도 도심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평지에 위치해 있지만 역시 터로만 남아있다. 도심과 가까이 위치했던 큰 사찰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일부 발견된 유적으로 그 흔적을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남아있는 경우 주변이 강대국으로 둘러싸인 한반도는 기후와 지리 특성상 대부분의 건물들이 나무로 지어져 전쟁 시 - 특히 몽골과의 - 불타서 소실된 경우가 많다. 거기다 고려시대의 불교문화에서 기를 펴지 못하던 유생들이 조선시대에 숭유 억불 정책을 실시했다. 불교문화의 부패를 눈으로 직시하여 신분상승의 한계에 분노한 유생들은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도시에 남아있던 사찰들을 불 질러 버리거나 일부 지방도시의 사찰은 서원으로 용도를 변경하여 그나마 남아있던 도시사찰의 명맥을 끊어버렸다.

그 결과 조선시대동안 산속의 선원-스님들이 수행하던 공간-들이 사찰로 변모하여 불교의 명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한양도성을 포함한 도심지에는 아예 사찰이 들어서기 어려웠기 때문에 그들은 산속에서 붓다의 말의 새기며 수행자로서의 삶을 이어왔다. 외부와의 단절이 오히려 그들에겐 전통을 굳건히 지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해방 이후 지금까지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사찰이 산속에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 상태로 근현대사를 지나고 여러 종교들이 한국에 들어오면서 불교인의 수는 점점 줄어들게 되었다. 이는 가난했던 한국이 전략적으로 소위 선진국의 종교를 받아들이면서(혹은 선진국이 전략적으로 그들의 종교를 후진국에 전파함으로써) 국가라는 집단으로써 큰 화합을 이루려 한 것도 큰 이유이다.



 하지만 불교의 길고 어두운 터널에도 끝은 있었다. 외부와 격리된 탓에 매우 잘 보존되어 있었던 그들의 오랜 전통에 매료되 드문드문 한국의 선불교에 관심이 생긴 외국 스님들이 한국에 와 승적에 이름을 올리는 일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산사가 알려지게 된 큰 계기는 2002년 월드컵 때이다. 방한하는 외국인의 숙소가 부족한 상황에 불교에선 그들의 건물 한켠을 내주며 템플스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일과 중엔 사람이 많고 번잡한 곳에 붉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서로 내지르는 월드컵의 열기를 느꼈다. 그리고 일과 후엔 산속에 위치한 사찰에서 500년간 조용히 이어온 그들만의 의식에 참여해 마음을 가라앉히는 체험을 하는 게 꽤 극적이고 인상적이었던 모양이다. 단발성 이벤트가 어느새 20년이라는 세월을 지속하게 되었고 이제는 외국인뿐만 아니라 국내인도 고리타분한 이미지에서 벗어난 힐링과 자아성찰이라는 큰 인생의 테마를 가지고 산사에 방문한다.

 도시의 사찰과 다르게 외형과 형식에 변화가 거의 없었던 한국의 산사는 서원과 더불어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다. 산사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의 등재는 단지 산사가 산속에 있어 그들의 건물이 잘 유지되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안에 1700년의 한국 불교 명맥을 이어온 노력들이 문화로 고스란히 남아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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