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발견
A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언니와는 달에 한 번씩 만나 미술관이나 영화관을 가고, 그도 아니라면 오래 걷고 싶은 길을 찾아간다. 여름엔 더위와 아이들 방학으로 만남을 건너뛰었다. 9월, 가을이 창 안으로도 들어올 즈음 보자고 약속을 잡았다.
그러고도 한동안 근황 토크를 이어갔다. 나이가 들수록 예술에서 받는 위로와 영감이 크다는 데 동의한 우리는 각자가 인상 깊게 본 영화나 책에 대한 의견을 자주 나눈다. 지난 달에는 영화 <퍼펙트 데이즈>(빔 벤더스 감독)를 공유했다. 거기에는 나뭇잎 사이로 빛이 들이치는 모습을 날마다 사진으로 찍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혼자 살며 도쿄의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는 그의 삶은 단조롭고 외로워 보인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생활을 성실하게 반복하며 아침에 바라본 하늘의 모습이나 출근길 차에서 듣는 음악, 점심을 먹으며 바라보는 나무와 햇살 한 줌에서 하루치의 위안과 기쁨을 얻는다. 일상 곳곳에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살뜰히 수집하는 그의 삶이 은은하게 감동을 주었던 영화.
‘코모레비(こもれび)’는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들이치는 햇살을 일컫는 일본말이다. 한 대상이나 삶의 순간에 찰나적으로 존재하는 아름다움을 은유하기도 하는 말. 영화에서 주인공이 사진으로 담는 나무와 햇빛처럼, 잠시지만 더없이 따스한 위로와 기쁨으로 우리를 어루만지는 것들을 ‘코모레비’라 부를 수도 있겠다.
지난번 대화에서 A 언니는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코모레비’라는 말이 예뻤다고 언급했다. 이번에는 그 말과 유사한 뜻을 지닌 우리말이 무얼까 고민하다 이런 단어를 찾았다며 알려주었다.
“볕뉘 : <1> 작은 틈을 통하여 잠시 비치는 햇볕 <2> 그늘진 곳에 비치는 조그마한 햇빛 <3>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는 따스한 보살핌”
고수리 작가의 따스한 산문에서, 전욱진 시인의 시에서 보았던 터라 낯선 단어는 아니었는데 ‘코모레비’와 연결 짓지는 못했다. 거기다 3번의 의미는 처음 접했다. ‘볕뉘’. 단어가 지닌 모양과 어감만으로 곱다 생각했는데 품은 의미마저 아름다운 단어였구나. 핸드폰 화면 위로 언니가 띄운 말풍선을 바라보는 사이 내 안에서 보드랍고 달콤한 솜사탕 하나가 돌돌 말리는 기분. 한 단어를 머금다 결이 같은 또 다른 단어를 찾아 알려주는 언니의 섬세한 마음이 내겐 볕뉘 같았다. 얼른 두 눈에 하트가 그려진 이모티콘을 눌렀다.
딸아이의 여름 방학 중 마지막 열흘은 강릉의 바닷가에서 보냈다. 남편은 주말만 쉬고 돌아가 일주일은 딸아이와 나 단둘이었다. 한번은 택시를 탔는데 둘이 왔냐는 질문을 받았다. 말의 뉘앙스가 묘하게 불편했다. 남편도 함께 머물다 출근했다고 하자 기사님이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돈 벌고 엄마는 돈 쓰고.”
상대를 잘 알지 못해도 자기 기준대로 말을 뱉는 사람이구나. 그런 사람에게 무언가를 더 설명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가 곁에 있어 나름대로 의견을 내보았다.
“어쨌든 방학은 보내야죠. 아이는 자라야 하고요.”
또 한 번은 머리카락에 세월이 하얗게 내려앉은 할아버지 기사님을 만나기도 했다. 운전을 하느라 뒷모습 밖에 볼 수 없었는데도 왜 이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아빠가 살아 계셨다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아빠는 IMF로 명예퇴직을 하고 한동안 택시를 몰았다.
“어디 묵어요?”, “물놀이는 했어요?” 목소리는 높지도 낮지도 않았고 억양이 세거나 지방 특색이 드러나는 말투도 아니었다. 차분한 목소리에서 평온함이 느껴졌고 그 말투에 무의식적으로 곤두서던 경계심마저 자연스레 누그러졌다. 기사님과 주거니 받거니 대화가 이어졌다. ‘마음이 맞는다’는 말에서 마음은 마음결이나 배려보다는 들리지 않는 파장이라던 이시다 센의 글처럼, 기사님의 파장이 나와 잘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주말을 지나며 바닷물의 온도가 급작스레 바뀌어 어리둥절하던 차였다. 현지 분이라면 이 미세한 차이와 이유를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며칠새 물 온도가 달라졌다고 말을 꺼내니 기사님은 이렇게 답했다. 말복 지나면 물놀이도 끝난다고. 신기하게도 절기가 바뀌면 바다의 온도가 급변한다고. 지난주까지 근 2주간 강릉의 기온이 35도를 넘어 37도까지 갔는데 그때엔 물이 미지근하다고들 했단다. 지난 토요일 바닷물이 미지근했던 게 그 때문이었구나 속으로 헤아렸다. 2주 동안 떨어질 줄 모르는 기온 탓에 바닷물도 식을 새가 없었는데 이번주 들어 35도 아래로 기온이 떨어지면서 물 온도도 낮아졌을 거라고 했다. 어제 보았던 물안개에 대해서도 여쭤보았다. 낮과 밤의 기온 차로 생기는 거지요, 기사님의 담담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아이가 신기하다는 듯 말했다.
“엄마가 택시에서 이렇게 말을 많이 하는 거 처음 봐.”
“응, 기사님이 친절하셔서. 나도 모르게 계속 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나 봐.”
아이가 평소와 다르다고 느낄 만큼 말을 많이 했구나. 마음의 주파수가 맞는 사람을 만나면, 어떤 파장이 통한다고 느끼는 사람을 만나면, 뜻하지 않게 마음을 열어 보이게 된다. 설령 그가 잘 아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마음의 파장이란 한 두 문장만으로 읽히기도 하니까. 그 사람을 속속들이 알지 못하더라도 지나친 관심은 쏟지 않고 편협한 시선도 들이밀지 않는다는 걸 단번에 알아챌 수 있다.
낯선 도시에서 남편 없이 아이와 둘이 보내는 생활, 알게 모르게 불안과 걱정이 자랐을까. “어디 묵어요?” “물놀이는 했어요?”같은 평범한 말이 나를 보살피는 말로 들렸다. 나이 지긋한 기사님의 관심이 볕뉘처럼 다가왔다. 돌변한 바다의 냉랭한 표정이나 불길한 징조 같았던 물안개가 자연의 이치에 충실한 현상이라는 걸 알게 되어 마음이 놓였고.
A 언니와 대화를 마무리하며 ‘모노노 아와레(もののあはれ)’라는 일본말을 들려 주었다. 여름휴가 때 우연히 보게 된 그림책에서 찾아낸 단어. 인생의 한 순간이 시간이 흐르며 애틋해지는 감정을 말한데요. 사물에서 느끼는 허무나 슬픔의 정서을 일컫기도 하고요.
여름의 끝자락이다. 바다를 회상하는 마음에 ‘모노노 아와레’가 깃든다. 시들어가는 매미 울음에도 애달픈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