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발견
지중해를 처음 본 건 스물아홉의 여름이었다. 프랑스 마르세유 근처의 작은 마을. 수영복을 입고 그 위로 옷을 걸친 후 숙소를 나섰다. 마을을 벗어나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지는 길을 걸었다. 마른 먼지를 일으키던 엷은 황갈색의 흙길은 숲이 시작되자 진한 황톳빛으로 바뀌었다. 오솔길을 따라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주변의 나무가 헐거워질 즈음 거의 다 왔다는 말을 들었다. 잠시 후 시야가 확 트이면서 바다가 펼쳐졌다.
코발트블루빛 물결이 너울거렸다. 파란 물감 수십 통을 쏟아부은 듯 선명한 진청색에 눈이 부셨다.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강렬한 햇빛에 물결의 표면이 희번덕거려 바다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생명체처럼 보였다. 낭떠러지처럼 끝난 길, 길 끝에 놓인 커다란 암석, 그 너머로 일렁이는 바다. 깊은 바다에서 수영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어디서 그런 용기가 솟아났을까. 수심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푸른빛에 이끌려 나를 던졌다. 물은 내 몸을 가라앉히는 대신 가볍게 들어 올렸다. 파란 물과 여름의 태양만이 전부인 곳에서 홀가분한 한 사람이 되었다.
바다에 나를 맡기자 바다와 나 사이 경계는 사라졌다. 유영하는 팔다리로 차갑고 물컹한 바다의 생명력이 스며들었고, 그 순간만은 나도 바다에 온전히 속한 존재라고 느꼈다. 당위나 자각 없는 백지상태로 바다와 포개어졌다. 어떤 지극함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알베르 카뮈는 이렇게 썼다. “행복이란 한 존재와 그가 영위하는 삶 사이의 단순한 일치 바로 그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65쪽, <결혼, 여름>, 김화영 옮김, 책세상)
여름이면 카뮈의 <결혼, 여름>의 책장을 뒤적인다. 카뮈가 예찬한 여름의 생명력과 아름다움을 한껏 호흡하려고. 가진 것을 버리더라도 가슴을 두드리는 대상을 향해 뛰어들 수 있는 청춘의 무모함과 용기, 자유를 환기하려고. 먼 여행을 떠나는 일이 간단치 않고 나를 잃는다는 게 또 하나의 죽음이 될 수 있음을 깨달은 중년이 되었지만. 지금 여기에서 여름에만 가능한 것들 아낌없이 누리자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 헐벗은 채로 행복한 한 사람이 되어 보자고 자신을 독려해 본다.
확신에 찬 카뮈의 목소리를 내게 들려주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방학을 맞은 아이에게 여름의 낭만이라는 걸 경험하게 해주자. 뜨거운 태양 아래 물놀이를 하고 실컷 낮잠을 자고, 팥빙수와 수박, 옥수수를 먹는 태평한 여름을, 별이 가득한 밤하늘을 헤아리다 별똥별을 만나고, 낯선 모험을 떠나기도 하는 그런 여름을 경험하게 해 주자고. 살갗을 검게 그을리는 만큼 건강한 마음을 키울 수 있다. 어떤 꿈과 용기는 아주 사소한 경험을 통해 누군가의 마음에 싹을 틔운다. 스케쥴러를 들여다보며 고심하다 이런 핑계를 대었다. ‘여름이니까.’ 무엇이든 잠시 미루어도 괜찮다는 표식처럼 열 개의 칸을 기다란 양쪽 화살표로 묶은 후 ‘여름휴가’라고 적었다.
강릉 해변 앞 작은 숙소를 빌렸다. 특별한 곳을 찾아가는 대신 날마다 집 앞의 바다로 나가 모래 놀이를 하고 파도 소리를 듣기로 했다. 그러니 짐도 간소하게 꾸렸다. 수영복과 옷가지 몇 벌에, 내 것으로는 노트북과 일기장, 그리고 소설책 두 권, 아이의 것으로는 일기장과 색연필, 그리고 오카리나가 전부였다. 우리의 계획은 하루 종일 물놀이를 하다 심심하면 오카리나를 부는 게 다였으니. 그런 생활이라면 여름의 태양을 미워하는 대신 곳곳에 생명을 불어넣는 힘에 감탄하고 감사할 수 있지 않을까, 차가운 바다에 몸을 담그고 신비로운 바다 생물을 만나게 해주는 태양의 열렬함을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저녁 늦게 도착한 첫날엔 바다 근처로 나가보지도 못했다. 다음날에도 갑작스러운 약속으로 시내에 나갔다 저녁 6시경에야 바다로 나설 수 있었다. 지는 해가 서쪽 하늘로 붉은 기운을 퍼뜨렸다. 그 시각 바다 위 하늘은 아그네스 마틴이 말년에 그린 화폭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모습이었다. <아기들이 오는 곳>(아그네스 마틴, 1999)처럼 연한 파스텔톤의 살구와 연두, 레몬과 회색빛 하늘색의 띠가 해수면 위로 층을 이루었다. 어둠이 다가올수록 색들은 더 옅어졌다. 사라지며 아스라해질수록 희미한 빛이 아련하게 아름다웠다.
바다로부터 소금기를 품은 끈적한 바람이 불어와 두 볼을 스쳤다. 해변은 폐장 시간이 가까운 놀이공원처럼 사람들이 빠져나가 쓸쓸한 기운이 감돌았지만 남아 있는 젊은이들 무리가 여름의 축제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기대감을 불어넣었다. 친구들끼리 놀러 온 청년들은 해가 지는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물장난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딸아이도 모래놀이에 빠져 들었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바다 위로 어스름이 드리웠을 때 불현듯 물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돌아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그 쓸쓸한 기운에 달려가 와락 안아주고 싶었던 언젠가처럼. 밤으로 돌아가는 바다를 마지막이라는 듯 품에 안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내 안에서 솟구쳤다.
모래밭에서 일어나 물속으로 들어가 몸을 띄웠다. 바다를 안아보려 했는데 바다가 나를 안았다. 그 물은 내 몸에서 흘러나온 체액 같았다. 푸른 피처럼 미지근하면서 미끌거리는 액체가 전신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지금 막 태어난 존재처럼, 새로 피를 공급받은 것처럼 온몸의 세포가 활짝 열렸다. 발만 담가도 차가움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는데 그 저녁의 바다는 내가 알던 바다와 사뭇 달랐다. 무엇보다 따스했고 깊지만 무섭지 않았고 드넓지만 두려움을 몰고 오지 않았다. 언젠가의 지중해에서처럼,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헤엄치던 한 존재인 듯 물결의 움직임에 몸을 맡겼다.
“아름다움은 삶에 대한 확실한 감응이다.”라고 아그네스 마틴은 말했다. 불현듯 물에 들어가고 싶었던 순간 그에 충실했다. 삶이 건네는 찰나의 손짓에 조응할 수 있었던 건 여름과 휴가, 바다와 저녁이라는 뜻밖의 조합 덕분이었을지 모른다. 지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듯 눈앞의 대상에게 온 마음을 건넬 때,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온다. 한 존재와 그가 영위하는 삶의 단순한 일치에서 행복은 윤슬처럼 드리운다.
강릉에 머무는 열흘간 바다는 여러 가지 얼굴로 수많은 진실을 속삭여 주었다. 아이는 누구보다 빠르게 파도와 모래, 물고기와 조개껍질과 서스름 없이 친구가 되었다. 원래 그런 사이였다는 듯 바다에만 도착하면 하염없이 시간을 흘려보냈다. 아이와 바다 사이에 조금 어정쩡하게 서 있던 나도 서서히 아이처럼, 그 언젠가의 카뮈처럼 바다의 일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매번 달려와 부서지고 그러고도 달려와 부서지는 파도를 보는 것으로 하루 종일을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열렬함을 생의 의지로, 살고 살리고, 사랑하겠다는 의지로 읽고 싶었다. 움직이면서 머물고 차가우면서 뜨겁고 멀어지면서도 가까워지는 폭발하면서도 폭발하지 않는 모순의 공간, 그 수평선에서 영원과 무한이 탄생함을 내내 생각했다. 그러느라 파도가 부서질 때마다 마음의 가장자리가 모래성처럼 허물어졌으나 모래 위로 겹치고 겹치며 선을 남기는 물결의 흔적처럼 어떤 마음은 새살 돋듯 자라났다.
서울로 돌아온 뒤로도 바다는 내 안에서 멈추지 않는다. 해변으로 달려와 겹겹으로 부서지던 파도처럼 그 언젠가의 지중해와 카뮈의 열띤 목소리, 사라지길 두려워하지 않는 아그네스 마틴의 엷은 색채까지 그 바다에 레이어를 얹는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돌림노래처럼 의미나 소리 없이도 파도는 생성한다. 태어나고 소멸하고 동시에 태어나고 소멸하면서 무정형의 시간에도 살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매일 바다를 보며 적은 글이 쌓였지만, 너무 빨리 생각하고, 너무 급히 말해버리지 않으려 덮어두었다. 아주 많이 동떨어진 어떤 것이 더디게 찾아올 것이므로. 성급히 문을 닫아버리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안다. 바다를 만나기 위해 멀리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어떤 마음은 매번 다른 얼굴로 탄생해 나를 살고 누군가를 살리고 사랑하고 말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