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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시에 대한 갈구

# Dingli Cliffs와 Blue Grotto

by 그루


Dingli Cliffs 와 딩글리 마을


임디나에서 201번 버스를 타고 딩글리 클리프를 찾았다. 하얀 돌담길로 이루어진 마을길을 조금만 벗어나면 이처럼 작은 섬에서 사람 하나 찾을 수 없는 바다가 보이는 야생의 들판을 만난다. 들판을 조금 지나면 깎아지른 절벽과 작은 테이블을 닮은 섬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저 탁 트인 바다를 만날 수 있다. 여기는 몰타의 남서쪽 바다, 보이지는 않지만 일직선으로 곧장 간다면 카르타고의 땅, 튀니지가 나온다.



딩글리의 높게 깎아지른 살벌한 절벽은 뒷전이고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절벽을 따라서 길게 형성된 석회암 색깔의 구멍 숭숭 뚫린 거칠지만 둥근 돌덩이들이다. 우리나라 제주도의 검정에 가까운 기공이 많은 현무암과 모양은 비슷한데 색깔만 다르다. 현무암과 태생도, 성질도 전혀 다른 이 곳의 석회암에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이유는 물에 약한 성질로 인해 오랜 시간 빗물에 녹거나 씻겨나간 자국일 게다. 그러고 보면,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황무지 같은 초원이거나, 햇살마저도 삼켜버릴 것 같은 황량하거나 거친 사막 같은 공간에 나는 몰두한다. 마음 깊은 곳, 어디에선가 거친 원시에 대한 갈구가 숨어 있는 것 같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여행자의 뒷모습만 찍으려고 했더니 뒤를 돌아본다. 사진 좀 찍어도 되냐고 물으니 “No Problem!”이라며 꾸밈없는 미소를 보내준다. 얼마나 고마운지, 한 친구의 모습은 프랑스 배우 ‘줄리엣 비노쉬’를 닮았다. 딩글리에서라면 더더욱, 절벽 끝에 마련되어 있는 벤치에 앉아서 소풍 온 것처럼 도시락을 먹어도 참 좋았겠다.



딩글리에서



경사가 있는 험한 지형을 좋아하는 염소 떼 들이 보이며 절벽 아래에는 역시 작은 땅이라도 놀리지 않는 몰타인들이 경작하는 밭이 일궈져 있고 가장 높은 절벽에는 고도가 가장 높아서인가, 몰타의 레이더 기지가 들어서 있다.


몰타에서 고도가 가장 높은 곳 중의 한 곳으로 천혜의 절벽으로 이루어진 딩글리 마을은 16세기에서 17세기경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몰타의 다른 지역에 비해 접근성이 어려워 해적들의 약탈로부터 매우 안전한 지역이었지만, 몰타 섬에서도 낙후된 지역이어서 20세기 중반까지도 학교가 없어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고 들판 일이나 가사 일을 도왔다고 한다. 마을로 들어서니 지하수를 뽑아 올리는 풍차가 여기저기 세워져 있다. 평균 97m에서 물을 뽑아 올린다고 하는데 현지인보다 관광객이 더 많은 몰타는 최근 물 부족이 문제라고 한다.


물을 뽑아내는 풍차시설, 뒤쪽으로 레이더기지의 둥근지붕이 보인다.


몰타의 기후는 지중해성 기후지만 고온건조한 건기와 비가 잦은 우기로 나뉘는데 우기는 한국의 겨울에 속하며 건기는 기온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올라가는 여름이다. 이 때는 비 한 방울 안 오면서 식물들까지도 너무 더워 성장을 멈추는 계절로 물 소비는 가장 많아 약 41만 명의 몰타 인구의 몇 배를 넘는 관광객들이 몰려 들어온다. 생각만 해도 물 공급이 심각할 것 같다. 여행하는 지역의 사정에 맞춰 여행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여행자의 덕목이 아닌가. 더운 계절에 몰타를 찾는 이들이라면 두 번 할 샤워는 되도록 한 번으로 줄이고 샤워는 간단히.


흰색 석회암의 둥글둥글한 돌로 쌓은 돌담길이 ‘딩글리’라는 이름을 닮아있다, 마을의 예쁘게 가꾸어 놓은 정원을 기웃거리지만 주인은 지나가는 손님 앉아서 쉬었다 가라고 낮은 담에 벤치를 곁들여 만들어 놓았다. 벚꽃 같기도 하고, 복숭아 꽃 같기도 한 꽃들이 온 나무에 가득 피어서 보름달처럼 매달려있고, 딩글리 마을로 들어가는 내 발걸음은 둥실 떠다니는 것 같다. 살고 있는 주민의 수에 비례해서 만들어진 교회와 광장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마을은 어느 마을이나 비슷하다. 지나가다가 과일 이름을 닮은 문패가 예뻐서 한 참을 바라보고 있었더니 청소를 하다 나온 예쁜 동네 아주머니, 자기 이름이란다. 아주머니가 갓 피어난 수선화를 닮았다.



d-15.jpg 딩글리 마을로 들어가는 길의 돌담과 선인장
Francis Ebejer


광장 한쪽에는 동네 마음씨 좋은 아저씨를 닮은 동상이 앉아 있는데, 딩글리에서 태어나 몰타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한 유명한 소설가인 Francis Ebejer(1925~1993)라고 한다. 어느 마을이나 인적이 드문 몰타지만 그들과 눈을 마주치면 따뜻하면서도 불편하지 않도록 과하지 않은 담백한 관심을 보여준다. 계획 없이 발길을 옮기다가도 버스에 보이는 발레타라는 이름은 정말 반갑다. 이곳은 다른 곳보다 버스가 빨리 끊길 것 같아 허둥지둥 들어온 발레타 행 버스에 올랐다. 아마도 이것이 마지막 버스일 거였다.



블루 그라토Blue Grotto


딩글리를 다녀온 다음 날, 슬리에마에서 X2를 타고 공항에서 블루 그라토행 버스 201번을 갈아탔다. 공항 정류장에서 생각 없이 201번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한국의 학생들이 알아보고 인사를 한다. 언제나 낯익은 모습은 반갑기는 하다. 어학연수 중인데 주말마다 몰타 구경을 하고 다닌다고 한다. 한 달 연수가 곧 끝나 이제 한국으로 들어가는데 생각만큼 언어 공부가 쉽지 않다고 한다. 누구나 그렇지만 한 달 만에 무엇을 얻겠는가. 그래도 나오지 않는 것보다는 나와서 우리와 다른 세상 구경을 해 보는 것은 값진 경험이 될 것이다.

버스 맵에는 71번과 201번 두 개의 노선이 있는데 71번은 보이지 않는다. 겨울이어서 한 개의 노선만 운행을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몰타의 남서쪽에 위치한 블루 그라토는 딩글리 쪽까지 연결된 절벽과 동굴들이 장관이다. 게다가 이름으로 붙여진 바닷물 색깔은 가장 영롱한 청록 색깔에 붙이는 지명이 아닌가.


타워라고 부르는 초소가 보이는 바다가 보이기 시작하니 역시 하늘도 바다도 아름답다. 멀리 유전과 관련된 시설이 먼 바다에 설치되어있다. 저 곳이 정말 유전이라면? 그냥 부러운 거지 뭐!


몰타 본섬에만 해도 30여개가 조금 안 되는 초소인 타워가 세워져 있다.
유전시설로 보였던 바다위의 설치물


블루 그라토의 동굴과 물을 보기 위해서는 배를 타는 투어를 해야 한다. 8유로, 맑은 날이어서 그런지 1월이지만 관광객들도 제법 많다. 6명 정도를 태운 배는 해식동굴과 절벽 가까운 곳으로 데리고 다니면서 설명을 해 준다. 물속으로 들어가서 확인하고 싶을 만큼 물 색깔은 환상이다.



8유로의 티켓을 끊고 배를 타고 나가면...
해식동굴과 하늘
사람들과 물빛


투어를 마치고 점심을 먹기 위해 입구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바닷가 레스토랑이니 생선요리 생각이 나 자리에 앉았는데 정류장을 보니 201번 버스가 멈춘다. 자동으로 벌떡 일어나 뛰었다. 버스에 타고서야 마주 보며 웃고 말았지만, 멈춘 버스를 보고 달려가 무조건 타버린 그때를 지금 생각해도 참 잘했다.


블루 그라토는 Hagar Qim 신전이 가까이 있으며 그곳에서 조금 더 가면 Imnajdra 신전이 위치한다. 몰타 섬에 산재해 있는 몇 천 년 전의 거석 신전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많지만 중요한 신전들이 이 지역에 있는 것은 바다에서 솟아오른 듯한 깎아지른 절벽이 있는 거친 지형에 망망대해가 눈앞으로 펼쳐지는 곳으로 신전이 있을 수 있는 조건이다.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Hagar Qim 신전이었다. 큰 돌덩이만 있는 재미없는 거석 신전을 두 개나 볼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트레킹을 할 기분이 생긴다면 Hagar Qim을 본 다음에는 Imnajdra 신전까지 걸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냥 천천히 걸어갈 수도 있는 것을, 오는 버스를 놓칠 새라 그냥 올라탄 것이 화근이었다. 한두 정류장만 가면 신전이 있을 만한 거리인데 말해주겠다는 버스기사만 믿은 게 잘못이었는지 훨씬 지나쳐 가고 있는 거다. 그러나 내려서 다시 뒤 돌아가는 짓을 하기에는, 버스 한 대 다닐만한 좁고 낮은 하얀 돌담길이 이어진 밭이랑사이로 구불구불 난 시골의 마을길이 너무 아름다웠다. 그냥 버스를 타고 인적 없는 깊은 마을로 들어가는 것을 택했다. 어떤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 비길까, 내가 언제 이런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본 적이 있었던가,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넋을 놓고 밖을 보면서 몸을 맡기면 될 뿐.


시기에위Siggiewi


얼마를 왔을까, 내린 곳은 광장의 교회가 하늘을 가리고 서 있는 것이 제법 큰 마을이다. 마을 사람에게 물어보니 발음하기도 어렵다. 시기에위Siggiewi라고 했다. 지도를 보니 딩글리 마을과 블루 그라토의 중심에 위치해 있어 이 지역의 중심도시 같기도 하다.

시기에위Siggiewi 교회
딩글리와 블루 그라토의 중심도시 Siggiewi, 귀한 201번 버스는 딩글리와 블루그라토를 지난다.



동네 아주머니께서 엄지를 치켜세우며 맛있다고 추천해 준 광장 옆의 레스토랑 ‘Papa’에서 일단 고픈 배를 채웠다. 시골밥상을 받은 기분이랄까, 둘이서 커피와 맥주 한 잔을 곁들여 맛있게 먹었어도 15유로 정도 계산한 것을 보면 몰타의 물가는 우리나라보다 살짝 저렴한 것 같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뚝딱 해치운 Papa 의 메뉴



말티즈어로 이야기를 하다가도 질문하는 내게 다소 딱딱하게 느껴지는 억양의 영어로 대답하는 동네 아저씨들, 지나가는 길손에게 미소를 보내는 아주머니들, 여행자가 잘 들어오지 않는 도시의 공간에 흐르는 공기마저도 신선하게 느껴지고, 계획과 전혀 다른 행보는 나를 들뜨게 한다. 낯선 도시에서의 여유 있는 시간은 덤으로 얻은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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