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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립소의 땅, 오기기아Ogygia

# Gozo - 빅토리아와 시타델라

by 그루


몰타섬의 가장 북쪽에 위치한 처케와Cirkewa 항에서 12시발 고조Gozo로 출발하는 연락선인 페리를 타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서둘렀다. 머무는 호텔에 체크아웃을 하면서 큰 짐은 맡기고 가벼운 배낭만 짊어지니 소풍 가는 것처럼 마음이 가볍다. 다행히 심하게 기다리지 않고 9시 30분 정도에 슬리에마 페리 정류장에서 222번 버스를 탔다. 몇 번 지나다녔던 파처빌과 줄리앙 지역을 지나고 사도 바울이 구조되었던 곳이라는 세인트 폴 베이가 있는 부지바까지는 낯설지가 않다. 다시 봐도 역시 아름다운 해안 도로이다. 멜리에하Mellieha를 지나고 나서도 한참 걸려 처케와 항에 도착했다. 처케와 항에서 시간적 여유를 못 느끼고 페리를 탔던 걸 보면 시간상으로 슬리에마에서 항구까지 1시간 30분 이상 걸린 것 같다.

처케와Cirkewa 항에서 고조섬 가기
고조와 몰타본섬 처케와항을 연결해주는 The Gozo Channel Line


고조에 들어갈 때는 티켓이 없다?


24시간 운행하는 페리의 Winter라고 쓰여 있는 타임테이블을 보니 늦은 시간이나 새벽만 제외하고 45분마다 한 대씩 출발한다. 배를 탈 때는 티켓 구입을 안 하고, 나올 때 왕복요금 1인당 4.65유로(2016년 1월 기준)를 받는다. 차량도 물론 나올 때 계산을 한다. 주말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The Gozo Channel Line페리는 1월, 비수기임에도 앉을자리가 없을 정도로 만원이다. 고조의 인구는 약 37,000명으로, 생각보다 많은 인구가 살고 있는 고조의 Mgarr항까지는 25분이면 도착한다. 항구 오른쪽에는 코미노 섬이 있고 앞을 보면 음가르 하버와 언덕 위의 교회, 또 다른 교회 아래는 옹기종기 주택들이 모여 앉아 있다.


고조의 Mgarr항


Calypso의 땅, 오기기아Ogygia

고조는 호머의 오디세이Odyssey에서 바다의 요정 칼립소가 살고 있는 섬인 오기기아Ogygia로 그려져 있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 전쟁이 끝난 후 고향집이 있는 이타카로 돌아가면서 그리 멀지 않은 트로이에서 이타카Ithaca의 아내 페넬로페에게 돌아가는 세월이 10년이나 걸린다. 귀향길에 만난 여러 가지 사건이 에피소드처럼 알려져 있지만 10년의 시간 중에서 오디세우스는 칼립소의 섬인 오기기아Ogygia에 무려 7년이나 머물렀다.


이타키라고도 부르는 이타카는 지금도 이오니아 해에 있는 그리스의 작은 섬으로 오디세우스의 고향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시칠리아의 동쪽에 위치한 이타카는 시칠리아와 매우 가까운 편이다. 시칠리아 바로 아래에 몰타가 있으므로 트로이 전쟁의 영웅인 오디세우스가 마음만 먹으면 고향집에 갈 수 있었을 것이므로, 바람 난 오디세우스의 7년을 진정 신들의 장난이었다고만 말해야 할까.

항구에 도착하면 택시를 흥정해서 다니다가 조금 늦은 오후에 호텔로 들어가기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항구에 내리니 우리 둘 중 누구도 다가오는 택시기사들에게는 눈길도 안 주고 고조의 중심도시인 빅토리아행 버스에 덥석 올라타버렸다.

"운이 좋으시군요!”


음가르항에서 언덕배기를 올라 조금 더 가니 웅장한 교회 건물이 눈을 사로잡는다. 정류장의 이름은 “Dome”눈 앞에 보이는 엄청난 돔이 있는 교회는 Xewkija Church로 고조의 어디에서도 보인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니 안내하시는 분이 입장할 수 있는 시간이 끝나 가는지, 시계를 보면서 “운이 좋으시군요!” 하면서 반긴다. 간결하면서 절제한 듯 내부의 돔이 인상적인데 안에는 작은 예배당을 개조한 박물관도 있어 관람할 수 있다. 3유로 하는 티켓을 끊으면 돔까지 올라갈 수가 있는데 시간이 끝나가서인지 창구에는 돈을 받는 사람도 없다.


Dome정류장, 버스는 323번 한 대만 운행한다.
간결한 내부장식


발음하기도 어려운 말티즈어로 된 세키야Xewkija마을의 인구는 3000여 명이 조금 넘는데 교회는 마을 주민이 전부 들어가고도 남는다. 거대한 돔으로 유명하여 그냥 돔 교회라고도 부르는 Xewkija 교회의 돔은 75m이며 폭은 25m로 고조의 어디에서든 다 보인다.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과 세인트 폴 성당 다음으로 유럽에서 3번째로 큰 돔이라고 한다.


엄청난 규모의 교회건물을 구경하려면 멀리서 봐야 하기에 마을 골목을 구경하는데 인적이 없다. 몰타는 국민들의 이민을 장려하는 나라이다. 땅의 넓이에 비해 적은 인구는 아니건만 어느 도시를 가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정말 드물다. 언젠가 살기 좋은 나라 1위에 뽑히기도 했지만 국민들이 운동을 안 하는 나라 1위로 인터넷에 올라온 것을 본 적이 있다. 살기가 좋으니 운동을 안 하나? 아무튼 별 생각을 다한다. 참! 뭘 물어보려 해도 사람이 없다.


Xewkija Church, 뒷골목에서


사람이 없어 더욱 차분한 골목의 집들은 다른 도시에서 봤던 집들과는 조금 다르다. 물론 라임스톤으로 만들어졌지만 간결한 사각형의 실용적인 북아프리카의 가옥구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형태에 바로크식의 장식이 덧대어져 있고 본 섬의 건물들보다 규모가 작은 아랍 식 발코니가 있다. 마을은 2층 정도의 스카이라인을 만들어 시선을 두기도 훨씬 편하다.


성 조지교회가 보이는 골목, 창문이 열려있는 발코니를 보고 싶었다. 그것은 사람이 살고 있다는 증거이니까..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버스를 타기 위해 돔 교회 앞으로 나오니 한시간에 한 번 운행하는 버스는 이미 지나갔다. 어머니와 부부로 보이는 가족이 버스정류장 쪽으로 오고 있었다. 놓치지 않고 택시를 탈 수 있는 승강장을 물었다. 빅토리아 시타델을 가려고 하는데 택시가 없다고 말이다. 잠깐 생각하더니 데려다주겠단다. 그때는 그냥 이곳 주민이라고 생각을 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이야기를 해 보니 몰타 본 섬에서 주말을 즐기러 온 것이었다. 한국 사람이라고 하자, 자신은 몰타 어학원의 선생님이란다. 그러면서 주말여행 중이냐고 묻는다. 어학연수로 한국 사람들이 워낙 많이 오니 배낭여행객이 아니라 어학연수생으로 생각을 해 버린 거다. 하긴 나이 들어 어학연수를 받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빅토리아


여행 중이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우린 빅토리아 시타델까지 금방 와 버렸다. 신세를 지면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선물용으로 가지고 다니는 양말 두 켤레로 고맙다는 말을 전하니 오히려 너무 고마워한다. 여행 중에는 늘 여행하는 지역에 사는 사람의 도움을 늘 받게 된다. 이것저것 부피가 작으면서 가벼운 생활용품들을 주로 가지고 다니는데 얼마 전부터 가지고 다니던 남자용 양말(여자는 기호가 다양해서 여자용보다는 남자용이 좋다)을 사용해본 결과, 다른 것 보다 좋은 선물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빅토리아의 원래 이름은 라밧Rabat으로 고조의 중앙에 위치하며 신석기시대부터 주민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고조에서 가장 많은 약 7000여 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1887년 6월 영국 정부가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인 Golden Jubilee을 기념하기 위해 빅토리아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몰타 본 섬에 있는 라밧과 구분하는 의미로 Ir-Rabat Ghawdex으로 부른다고 한다. 버스정류장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마을의 중심 광장Independence Square이 나온다. 광장이라고 하기에는 작지만 성제임스 교회가 있고 그 옆에는 인포메이션 센터가 있으며 들어가 보고 싶은 작은 영화관도 있고 극장도 있다. 광장에서 위쪽으로 오르면 시타델이 나온다.


아이다를 공연하고 있다. 광장 옆, 너무 예쁜 극장


도시 속의 또 하나의 도시 ‘시타델Cittadella

‘Cittadella’는 빅토리아의 심장과도 같은 견고한 작은 성채도시다. 대규모의 공사를 하고 있는 성문을 들어서면 성모승천교회Cathedral of Assumption가 위치한다. 눈에 익은 바로크 양식의 교회는 17세기 임디나의 세인트 폴 교회를 지은 로렌조 가파Lorenzo Gafa에 의해 세워졌다. 두 교회 정면의 디자인이 매우 유사하다. 성채는 교회를 중심으로 양 옆으로 설계가 되어있으며 박물관과 감옥, 선물가게 및 카페까지 다양한 시설물들이 현대의 복합몰처럼 어우러져 있고 위로 올라가면 더할 나위 없이 견고한 성채의 구조를 확인할 수 있다.


성문을 들어서면 성모승천교회가 보인다.


시타델은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1500년에 페니키아인들이 만들었다. 로마시대에는 아크로폴리스와 콤플렉스로 사용되었다. 중세시대에 Gran Castello로 알려졌으며 지금의 성채는 17세기 성 요한 기사단에 의해 세워진 것으로 북쪽 벽에는 15세기에 세워진 성벽의 일부가 남아있다. 성벽 위로 난 길을 걸으며, 오래전 아드리아해의 바다로 난 두브로브니크의 아름다운 성벽 위를 걷고 있는 착각에 빠졌다.

성벽길과 성모승천교회의 뒷모습


돌로 만든 성채는 10세기 말에서 11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프랑스를 중심으로 시작된 성채 건축은 비잔틴과 이슬람 건축의 영향을 받아 디자인되었으며 십자군 전쟁을 통해 동방의 건축방법은 유럽인의 성채 건축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아름다운 성채의 대명사인 크락 데 슈발리에Crac des Chevaliers와 로도스와 발레타 등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채를 소유했던 성 요한 기사단은 소규모의 인원으로 방어를 해야만 했기에 집요하게 튼튼하면서도 크락 데 슈발리에처럼 견고하면서도 아름다운 성채를 열망했다. 막강한 부를 가지고 있었던 그들은 당시 가장 뛰어난 성벽 기술자였던 이탈리아, 그중에서도 베네치아의 장인들을 초청해서 완벽에 가까운 성채를 만들었는데 로도스에서도 몰타에서도 이탈리아 장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현재의 성채들을 완성했다.

3성 요한 기사단 시절, 남쪽으로는 이집트, 튀니지 등의 북아프리카가 위치해 있어 실제로 이슬람 세력의 최후 보루였던 몰타는 그리스도 세계를 방어하는 땅이었다.



성 위에 있는 주거민들의 거주지역의 폐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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