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9월의 산과 들, 그리고 하늘이 새롭다

# 한국의 섬 - 옹진 백아도

by 그루


12시 20분 굴업도에서 백아도행 배를 탔다. 지척일 것 같아도 30여 분이나 걸린다. 배에서 내리는 사람은 예닐곱 명이다. 수십 명에서 백여 명이 타고 내리는 굴업도와는 달리 한산하니 마음까지 여유가 생긴다.

민박집 픽업트럭이 왔지만, 보건소 마을에 예약한 민박집은 선착장에서 지척이다. 주인아주머니는 어디에서 출발했냐고 물어보신다. 굴업도에서 왔다니까, 엊그제 굴업도에서 확진자 한 명이 나왔다면서 “아이고, 큰일이야. 옹진에서도 나오기 시작하니”, 하시면서 경계를 하신다. 굴업도에서는 듣지 못한 소식이었다. 어디에서나 손님은 환영받지 못한 시대가 되었다.

응회암 절리를 따라 풍화된 돌탑 형식의 tor토르(또는 토어)가 보인다. 백아도 선착장의 기차바위


깨끗하고 아늑한 방을 보니 해가 떨어질 때까지 나가기가 싫다. 남편은 대놓고 등을 보이며 눈을 감아버린다. 이틀에 걸쳐 굴업도에서 몸이 혹사를 해서 피곤하니 건들지 말라는 제스처다. 연속으로 트레킹을 지속하는 일정은 피하기로 했지만, 백아도에 발을 디뎠으니 남봉은 보고 가야 할 것 아닌가, 운명처럼 몸을 움직였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지만, 너무나 맑아서 투명한 공기를 가르고 길로 나섰다. 집 옆에서 뭔가를 다듬고 있는 동네 아주머니에게 남봉 가는 길을 물었다. 눈도 안 마주치고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해변 길이다. 몸짓에 외지인을 반기지 않는 마음이 역력했다. 옆 섬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니, 나라면 더 했을 것이다. 섬사람들에게 해변 길은 지름길이지만, 육지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땅으로 난 것이 길이다. 남쪽으로만 가면 남봉이 나올 것이니 그냥 방향을 잡고 길로 나섰다. 해변으로 들어서는 것 같더니 다시 길 쪽으로 올라오는 것이 미안했던지 “해변으로 주욱 가면 되는데, 근데 그 길로 가도 돼” 하시며 들어가신다.

백아도 앞 바다 풍경
아름다운 백아도 해안선 길


백아도의 전체적인 모양은 해마가 동쪽을 보고 있는 형상이다. 혹자는 ‘ㄷ’ 모양이라고 하는데. 김정호 선생님은 섬의 구부러진 모습을 인사를 하는 모양으로 보았나 보다. 그는 대동여지도에서 배알拜謁도라고 불렀다. 사나운 느낌이 드는 ‘흰 상어 이빨’이라는 뜻의 백아도보다는 배알도가 더 좋다.


섬의 끝에 있는 남봉 가까이 가려면 선착장 부근에서 약 2Km는 걸어야 한다. 오른쪽으로는 소나무와 소사나무가 빼곡한 녹색의 숲이 이어지는 정돈된 해안 길을 따라가면 또 다른 선착장도 나오고 작은 항구도 보인다. 날씨 탓인가, 작은 섬들이 점점이 박혀있는 눈앞에 펼쳐지는 해안 풍경이 호수 같다. 공용 화장실 옆 소나무 밭에는 같이 들어왔던 백패커 4명이 자리를 잡고 늦은 점심을 먹으며 아는 척을 한다.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하지만, 덥석 동석을 하는 것은 바보짓이다. 자리 한 번 잘 잡았다. 옆에는 깨끗한 공용 화장실이, 앞으로는 해변이 있고 길 건너 뒤편에는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백아 분교 터로 추정되는 넓은 공터가 있다. 한적하니 편하게 캠핑을 즐기다 갈 수 있겠다. 보는 사람 마음이 다 편하다.

네 사람의 하룻 밤


갑자기 재앙처럼 다가온 바이러스로 인해 훌쩍 늘어난 백 패킹 열풍에는 아무리 조심해도 주민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행위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


얼마 전 군산 장자도 옆 대장도의 대장봉 정상의 데크와, 금오도 비렁길 데크에서 텐트를 친 백패커들을 만났었다. 그럴 때면 이유 없이 텐트 옆을 지나가는 사람이 미안하고 조심스럽기까지 하는데, 사람들이 공유하는 그곳에서 텐트를 치는 것보다 더 문제는 그곳에는 화장실이 없다는 것이다. 지난가을, 석모도를 걷다가 만난 어류정항의 공용화장실은 들어가지 못할 정도로 불결했다. 처음에는 이해를 못했지만 그 옆에는 백패킹을 금지한다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플래카드는 바다가 보이는 정자에도 걸어놓았다. 화장실을 사용하지 못할 정도로 불결하게 방치해놓았다면, 대놓고 ‘우리 동네에 백패커들은 오지 말라’는 이야기다. 주민들의 분노가 보였다. 지난해 가을에 방문했던 소청도 분바위 근처에서는 낚시도구가 앞에 널려있고, 나무 정자 위에 텐트를 치고 음식을 먹고 있던 사람들을 무심코 지나쳤다. 그러나 같이 가던 소청도 해설사님께서 뒤돌아서 가시더니 그들에게 당부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결코 그들이 불쾌하지 않도록 정중하게 말씀하셨지만 돌리는 발걸음에는 걱정이 서려있었다. 최근에는 캠핑장 기반 시설이 훌륭한 관리도에서조차도 캠핑장 이외의 조망 데크에서 캠핑을 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을 올린 블로그를 보았다.

늘어나는 백패커에 맞춰 캠핑장이 부족해도 너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찾아보면 의외로 많다. 전국에는 휴양림이 있는 크고 작은 많은 산들이 있으며, 캠핑 사이트가 조성된 해변도 제법 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여행자는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의 땅을 잠시 빌려 밟는 것이니 고마운 마음을 갖아야 하며 예를 들어 ‘쓰레기’ 또는 ‘떠들썩함’ 같은 것으로 주민들에게 주는 피해는 최소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나친 요구가 아니라면 원주민이 원하는 규범을 지켜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9월은 역시 가을이다. 한적한 섬, 길 옆에는 작은 꽃잎을 가진 가을꽃들이 햇살을 받아 눈부시다. 둥글고 넓적하며 잎맥으로 한껏 멋을 부린 이파리를 가진 붉게 달아오른 망개 열매를 만난 것도 처음이다. 잎이 넓적하고 생육이 왕성한 칡은 길 양 옆의 식물들을 제치고, 햇빛을 가리고, 옆으로, 위로 영역을 넓히고 있지만, 내게 처음 보는 칡꽃은 예쁘기만 하다. 다양한 탁한 보라색을 가진 칡꽃은 여러 개의 꽃송이가 뭉쳐서 피는데 아기 주먹만 하다. 길가의 식물들과 아는 척을 하며 마주 보고 걷는 기쁨은, 늘 앞선 이의 재촉하는 소리에 깨져버리곤 한다. 나는 아직도 9월의 산과 들, 그리고 하늘이 새롭다.


자주조희풀/까실쑥부쟁이
칡꽃/ 무룻

남봉능선


보건소 마을에서 2Km 정도 걸으면 발전소 마을 전에 남봉으로 오르는 표지판이 서 있다. 백아도에는 선착장과 가까운 북쪽에 보건소 마을이 위치하며, 섬의 끝 남쪽 남봉 근처에 발전소 마을이 있다. 두 마을이 걸어서 오고 가기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데 선착장까지 따로 있어 마을 사람들이 서로 친해지기에는 너무 멀다. 두 마을의 중앙에 있던 백아 분교는 1991년 폐교가 되어 사람들이 만날 유일한 장소가 사라졌다.

입구 표지판에는 남봉까지 1,6Km라고 쓰여 있다. 하지만 수풀이 우거져 표지판 앞에서 입구가 보이지 않아 잠시 서성거렸다. 남봉은 이름이 제법 알려진 능선인데도, 들머리를 유심히 찾아야 보이는 것은 시설을 관리할 만큼 주민들이 많지 않고, 사람들의 방문이 적다는 것이며, 정글 같은 숲을 헤치고 올라가야 한다는 뜻이다. 막대기로 거미줄을 걷으면서 천천히 나아가는데 긴 팔과 긴 바지의 등산복이 아니라면 모기와 벌레의 습격을 받기 딱 좋은 정글이다. 뱀도 조심해야 한다. 이처럼 경계해야 할 것도 많지만, 이 숲에는 요정처럼 매혹적인 가을꽃 천지다. 분홍색 색종이를 또르르 말아놓은 것 같은 자주조희풀과 국화보다 섬세한 잎을 가진 까실쑥부쟁이, 자줏빛 싸리나무 꽃, 발랄해 보이는 개미취 등 마음을 움직이는 가지각색 야생화들로 즐거워진다.

그러나 정글은 잠시, 규모가 크고 거친 집괴암과 응회암 바위군으로 이루어진 능선이 나온다. 공룡의 척추 같은 능선을 조금만 올라가도 백아도의 지형을 짐작케 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백아도의 서쪽(북서) 해안은 수직 절벽을 이루고 있고, 마을이 형성된 동쪽 해안은 대체로 완만하며 작은 섬들로 인해서 앞바다는 잔잔하다. 하지만 남봉(145m) 능선은 서쪽뿐만 아니라 동쪽 해안까지도 아래를 내려다보면 모골이 송연해지는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위에 기대고 올라가야 하는, 보호 장치가 없는 능선은 매우 위험해 보인다. 능선은 호쾌하고 압도적이며 어우러진 바다는 섬세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화산 파편들을 버무려 놓은 듯 거친 집괴암 덩어리와 그나마 밝고 부드러워 보이는 응회암으로 이루어진 바윗돌 사이에 수를 놓은 것처럼 피어있는 분홍 빛 무릇은 내가 뽑은 백아도 최고의 아름다움이다.

공룡의 척추를 닮은 남봉 능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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