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Ⅰ- 2. 마다가스카르의 향기 - 바닐라
바닐라 Vanilla planifolia
1519년, 중앙아메리카 아즈텍 왕국(1428~1521)의 황제 목테수마 2세 Moctezuma II(재위 1502/1503~1520)는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 Tenōchtitlan에서 스페인 사람 코르테스 Hernándo Cortés에게 카카오에 바닐라를 곁들인 초콜라틀 xocolatl이란 음료를 대접했다. 향긋한 바닐라향이 더해진 이국적인 초콜라틀의 맛은 코르테스를 단박에 사로잡았다. 1520년경, 코르테스가 스페인으로 돌아올 때 카카오 열매와 바닐라를 가져왔음은 물론이다.
바닐라와 함께 중앙아메리카로부터 열대의 섬에 이식된 카카오는 별 탈 없이 카카오 열매를 생산해 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바닐라는 열매는 차치하고 꽃마저도 피우기가 쉽지 않았다. 드디어 1806년에는 런던으로 이주한 바닐라에서 예쁜 바닐라 꽃이 피었다. 유럽 각지로 퍼진 바닐라는 맑은 연둣빛을 띤 흰색 꽃을 아주 잠깐 피울 뿐 여전히 바닐라빈은 생산하지 못했다. 프랑스의 식민지 섬 레위니옹과 모리셔스에서 재배를 시작한 바닐라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시간이 흐른 후, 식물학자들은 중앙아메리카에만 바닐라꽃 수분을 해주는 곤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아메리카의 숲에 사는 멜리포나 Melipona라는 작은 벌이었다. 이후에도 바닐라 생산을 위해 꾸준히 공을 들였지만 정작 바닐라 자가수정을 성공시킨 사람은 레위니옹 섬에서 일하던 12세의 노예 소년 에드먼드 알비우스 Edmond Albius(1829~1880)였다. 코르테스가 바닐라를 스페인에 들여온 지 약 300년이 지난 후였다. 그때까지 바닐라재배를 포기하지 않고 연구를 계속한 알비우스의 주인이었던 프랑스 농장주에게 경의를 표한다.
수분에 성공한 바닐라는 곧 레위니옹(당시 이름은 부르봉) 섬 주변의 마다가스카르와 코모로 제도 등으로 재배지를 넓혔다. 이때 퍼져나간 바닐라를 버번(부르봉) 바닐라 혹은 버번 마다가스카르 바닐라라고 부른다. 마다가스카르는 바닐라 세계 최대 생산국이 되었다.
바닐라 Vanilla planifolia의 이름은 16세기에 스페인 사람들이 vainilla라고 부르던 것을 줄여서 칼집, 또는 콩깍지 모양을 뜻하는 ‘바이나 Vaina’라고 불렀다. 바닐라는 난초과 식물로 콩과가 아니기 때문에 꼬투리나 깍지라는 명칭은 어울리지 않지만 10~20센티미터에 달하는 바닐라 열매가 콩깍지형태를 닮아 굳어진 것이다. 1754년, 식물학자 필립 밀러는 그의 저서《Gardener’s Dictionary》에서 바닐라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꽃에서 향을 추출하는 일랑일랑과는 달리 바닐라는 바닐라꼬투리 안에 있는 미세한 까만 씨앗들에서 바닐라향을 추출한다. 호불호가 없는 바닐라는 날이 갈수록 수요는 많아지는데 생산량은 고정적이다. 꽃은 하루 만에 피었다가 지기 때문에, 꽃이 피면 12시간 안에 손으로 수분을 시켜야 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에드먼드 알비우스가 알아낸 방법으로 수분을 시킨다. 수분 작업을 포함해 꼬박 3년에서 4년에 걸쳐 수확하는 공정은 길고 매우 노동집약적이다.
그래서 1874년, 독일의 화학자 페르디난트 티만 Ferdinand Tiemann과 빌헬름 하르만 Wihelm Haarman은 비싼 바닐라의 향을 대체하기 위해 에틸바닐린이라는 인공 바닐라 향을 만들었다. 1876년, 자신감이 넘친 두 사람은 바닐린이라는 합성 화합물을 생산하기 위하여, 독일 니더작센주의 홀츠민덴 Holzminden에 있는 넓은 숲을 사들여 그곳에 소나무 숲을 조성했다. 소나무 껍질의 성장 조직에 있는 코니페린 Coniferin과의 합성을 통해 바닐린을 추출하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소나무 숲은 그들이 채취할 합성바닐린 공장이었다.
지금도 인공향료인 에틸바닐린은 바닐라 수요의 95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며 수많은 과자와 음료, 아이스크림, 화장품 등에 ‘바닐라 향’, 또는 ‘바닐라 맛’이라는 상표로 우리를 현혹시킨다.
그렇다고 주변에 천연바닐라를 사용한 제품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하겐다즈 같은 가격이 비싼 아이스크림에는 천연 마다가스카르 바닐라가 들어간다. 아이스크림에 촘촘히 박혀있는 검은 점은 천연 바닐라의 증거이기도 하다.
의외의 제품도 있는데 가장 대중적인 음료에 속하는 코카콜라 Coca-Cola Classic은 마다가스카르 바닐라가 들어가는 대표적인 상품이다. 거기에 더해 2002년도에는 Coca-Cola Vanilla를 출시했다. 베리에이션 제품 중 제일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코카콜라 클래식의 강한 맛보다는 부드러우며 마시고 나면 차 한잔을 마신 것처럼 달달한 바닐라 특유의 향기가 꽃향기처럼 잔향을 남긴다. 근래에도 종종 재출시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콜라를 즐기지 않지만 바닐라코카콜라를 구입하기 위해서는 지갑을 연다. 맛은 개인적인 취향이 우선이지 않나?
18세기에 프랑스는 멕시코에서 수입한 바닐라를 이용해 최초로 아이스크림에 바닐라향을 사용하였다. 1885년 프랑스가 마다가스카르에서 일찌감치 점유한 도시 안치라나나 Antsiranana(당시 이름은 디에고 수아레즈 Diego Suarez)에서는 여전히 천연바닐라를 사용한 아이스크림을 판매한다. 혹시라도 디에고 수아레즈에 들린다면 19세기의 풍경과 별반 다르지 않은 아이스크림 가게에 앉아 더위에 빠르게 녹아내리는 바닐라아이스크림을 안타까워하며 아이스크림 맛을 보길 바란다. 가게(Boulangerie Amicale)는 다른 메뉴로 인해 평점이 그렇게 높지 않지만 아이스크림 맛집임은 확실하다. 어쩌면 그 당시의 맛과 가장 유사한 바닐라 아이스크림 맛있수도 있지 않나.
디에고 수아레즈보다 여행객이 훨씬 많은 노시베 Nosy Be에서도 맛있는 바닐라아이스크림을 맛볼 수 있다. 툭툭이를 타고 가다가 툭툭이 기사에게 잠깐 양해를 구하고 구입한 곳이어서 사진은 없다. 하지만 마다가스카르 노시베 헬빌 Hell-Ville의 가장 번화한 다운타운에서 현지인에게 물으면, 자수성가한 말라가시인이 운영하는 아이스크림 가게 'La Gastro Pissa vanilla ice cream'을 가르쳐줄 것이다. 바닐라아이스크림은 수도 안타나나리보나 관광객이 많은 무른다바에도 있지만 노시베에서 먹은 바닐라아이스크림은 마다가스카르에서 가장 맛있는 바닐라 아이스크림이었다.
오늘날 전 세계 바닐라 공급량의 80퍼센트 정도를 생산하는 마다가스카르의 바닐라는 열대우림 지역인 북동부 해안에서 주로 재배한다. 난초과 식물인 바닐라는 습한 열대 숲에서 잘 자라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다가스카르의 동부 지역은 여과 없이 인도양의 사이클론을 맞는 곳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2017년 3월, 마다가스카르에 두 번이나 들이닥친 사이클론으로 전 세계 바닐라 공급량이 30퍼센트 이상 급감했다. 당시 1킬로그램당 500~520달러였던 은의 가격을 뛰어넘어 최고 620달러까지 치솟았다. 바닐라 한 가지 품목만으로도 마다가스카르의 경제가 휘청거렸다. 2024년 3월에도 사이클론 ‘가마네’가 북부 지역을 강타했다. 우리가 마다가스카르 북부를 찾은 시기는 약 보름 후였다. 이처럼 우기인 1월에서 3월 사이에 마다가스카르를 찾아오는 잦은 사이클론은 그해 바닐라 생산량을 좌우하는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