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라멘타치오’(애통)

# Haghpat수도원과 사나힌Sanahin 수도원

by 그루 Oct 19. 2015
아래로


트빌리시에서 출발하여 1시간 30분 만에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국경에 도착했다. 아르메니아입국은 비자를 작성하고 비자 피 7달러를 내면 수속은 간단하게 끝나는 편이다. 옆에서 보니 미국인은 무비자다. 아르메니아에 들어오면서 생각이 많아졌다고 해야 하나, 생각이 깊어졌다. 이 작은 나라는 세계 역사라는 큰 강물에 부평초처럼 떠다녔지만 그들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아, 아르메니아 돌십자가에 새긴 염원



아르메니아는 기원전 9세기~기원전 6세기에 앗시리아와 대적할 정도로 근동지역의 강자였던 우라르투왕국 The Kingdom of Urartu의 후손이다.


녹색으로 칠해진 곳이 우라루트왕국의 위치이다.


우라르투 왕국은 앗시리아와 맞설 정도로 강대국이었으나, 메디아와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아오다가 기원전 189년 아르타시스Artashes1세가 대 Great아르메니아(BC191∼428)를 건국했다. 아타르시스1세의 손자인 티그란대제(BC95~BC66, 또는 BC55) 때는 서쪽으로는 카스피해, 동쪽으로는 지중해에 이르는 전성기를 이룩하지만 동쪽으로는 파르티아와 서쪽으로는 로마의 침공을 받고 5세기 대아르메니아는 멸망한다.




언제부터 사용된 나라의 이름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르메니아의 기원이 되는 Armina라는 이름은 기원전 521년 기록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의 묘비문에서 발견되었다.


셀주크 투르크의 박해를 피해 지중해 연안으로 피신한 일부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나톨리아 지역 지금의 터키 남동부를 중심으로 십자군 전쟁때 유럽세력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기도 했던 킬리키아(또는 실리시아) Kingdom of Cilician Armenia왕국(1199–1375)을 세우기도 하였다.

   

40년경부터 그리스도의 제자인 바르톨로메오와 유다에 의해 기독교가 전래되기 시작했으며 301년 트리다테스 Tridates 3세(238~314) 때에는 성 그레고리우스의 전도로 지구상에서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동로마와 파르티아의 침략으로 아르메니아가 멸망하자, 지푸라기 같은 나라의 신세를 극복하기 위해 405년 메스로프 마슈토츠 Mesrop Mashtots는 아르메니아의 고유 문자를 창제한다. 그때부터 고유 문자로 정신적 지주인 성경을 번역하고 그들의 문학과 역사를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아름다운 고문서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된 것이다. 그들의 고유 문자는 누가 뭐래도 지금까지 그들이 세계의 무대에 살아 남아있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후에도 현대까지 주변 강대국들(셀주크 터키, 페르시아, 비잔틴제국, 이집트, 몽골, 티무르, 오스만 터키, 러시아)의 힘의 균형에 따라 아르메니아의 국운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촛불이었다.      



‘라멘타치오’(애통)


"소동은 서울시향과 협연한 아르메니아 출신의 첼리스트 나레크 하크나자리안(27)이 차이코프스키의 야상곡 C#단조, 로코코 변주곡 A장조를 연주한 직후 앙코르곡을 연주하려 하면서 시작됐다.

그는 “아르메니아인으로서 제가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이슈에 이 앙코르를 바치고 싶다. 올해 2015년은 아르메니아 대학살 100주기 되는 해”라고 말했다. 이 때 터키인으로 추정되는 한 관객이 “정치적인 발언은 하지 말라!”고 야유를 퍼부었고, 객석은 술렁거렸다.

하크나자리안은 “아르메니안 대학살은 오스만 제국이 1915년에 저질렀고 약 150만 명 정도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죽었다”고 꿋꿋하게 발언을 이어가자 다시 한번 “입 닥쳐!(You shut up!)”라는 야유가 터졌다..... 중략..... 객석에서 연주자를 응원하는 박수가 쏟아졌다. 하크나자리안은 “15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바치고자 조반니 솔리마가 작곡한 ‘라멘타치오’(애통)를 들려드리겠다”며 연주를 시작했다....... 커튼콜은 3차례 이어졌다."   

2015년 05월 15일 자 한국일보 신문에 실린 5월 14일 밤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벌어진 작은 소동에 대한 기사이다. 나레크 하크나자리안은 1988년 아르메니아 태생으로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2013년 6월에도 서울 시향과 협연을 한 적이 있는 연주자이다.   


아르메니안 Genocide 


오스만 투르크는 1894년 러시아로 기우는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에 사는 아르메니아인들을 폭동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약 30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학살했으며 1914년까지 계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터키 군에 소속된 아르메니아인들이 있었던 반면 일부 아르메니아인들은 적국인 러시아군으로 참전하자 1915년 4월, 약 15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학살하였다. 남아있는 여자들에게는 얼굴이나 몸에 문신까지 새겨 넣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300만이 조금 넘는 현재 아르메니아의 인구의 반, 그것도 징병이 가능한 나이의 남자들이 중심이 되어 죽어나갔다고 생각을 하면 이런 일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넘어선다. 하지만 현재의 터키 정부는 내 이웃나라 일본처럼 구차한 변명만 할 뿐 자신들의 행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근거를 댈 수는 없지만, 히틀러가 유대인 학살을 터키의 아르메니안 제노사이드를 보고 배우지 않았을까 하는 이야기를 어디에선가 봤던 기억이 있는데, 가능한 일이다.

수도 예레반에 있는 제노사이드 추모비, 아라랏산을 모티브로 한 조형물로 왼쪽은 국내아르메니아인들을, 오른쪽부분은 외국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을 상징한다.
추모탑 안의 불꽃과 헌화들


이후 수백만 명의 추방당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곳에 살던 많은 사람들이 삶터를 등지고 해외로 빠져나가 아르메니아인 디아스포라가 본격화되었다.사실상 본국에 사는 인구보다 해외에서 더 많은 동포가 살아가고 있는 나라다.     

1918년, 아르메니아 민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1920년 8월 10일에는 오스만 투르크와 연합국 간에 Sevres 조약이 체결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은 이 조약으로 예전의 넓은 영토를 잃었고 현대의 터키가 탄생되는 계기가 되었다.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독립 승인과 함께 오스만 제국이 통치하던 지역을 아르메니아에 돌려준다는 내용이 있었지만 조약은 이행되지 않았고 새로 들어선 터키 정부는 1923년 로잔조약에서 현재의 터키 국경을 확정 짓는다. 아르메니아는 1922년 소비에트 연방에 편입되었다가 1991년 9월 독립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아그파트Haghpat Monastery    


조지아에서 아르메니아로 국경을 넘으면 데베드Debet협곡이 있는 아르메니아의 알라베르디지역이다. 이 곳에는 아르메니아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한 곳인 Haghpat수도원과 사나힌Sanahin 수도원이 위치한다. Haghpat수도원은 (966~991) 10세기에 건설하기 시작한 대규모 수도원 단지로 10세기에서 13세기까지 비잔틴 양식이 합쳐진 아르메니아 교회 건축의 모습을 완벽하게 지니고 있다. 주 예배당에는 흐릿하지만 프레스코화의 흔적들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배당의 중심에는 돔을 지탱하는 기둥이 없이 돔이 얹혀져 있다. 돔 지붕에 낸 구멍 yerdik으로는 자연광이 실내로 들어온다.  

각종 문서가 필사되었던 곳인 사자실 scriptorium은 문서를 보관하던 서고로 습도와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 건물이 땅 속에 들어가 있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각종 문서를 땅속에 묻은 항아리에 넣어서 보관한 것을 볼 수 있다.


.  예배당의 중심에는 돔을 지탱하는 기둥이 없이 돔이 얹혀져 있다.
Haghpat수도원 , 오른쪽 흙 높이에 지붕만 보이는 곳이 문서보관실인 사자실이다.


사나힌 Sanahin수도원


사나힌은  "this one is older than that one", “저것보다 더 오래된”이란 뜻으로, 가까운 곳에 위치한 Haghpat수도원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뜻이다. 실제로 대성당 북쪽의 성모교회 Astvatzatzin가 934년 비잔틴에서 피신해 온 수도사들에 의해서 건축되었다고 하니 아그파트수도원보다 오래된 것은 맞다.

 

주 예배당인 구세주의 대성당 Cathedral of the Redeemer은 10세기에 세워졌으며 돔 중앙의 구멍은 조명의 역할을 하며 각종 연기가 빠져나가는 구멍이기도 하다. 정사각형 방에 4개의 기둥이 지붕을 떠받치고 지붕 중앙의 구멍으로 연기가 배출되는 이러한 건축구조를 지닌 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데 이런 구조는 아르메니아 농부의 전통가옥에서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또한 수도원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10세기에서 13세기까지 번성했던 키우리크왕조 Kiurikian dynasty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신학은 물론 의학을 비롯하여 장식가와 서예가의 학교였다고 한다. 벽면에는 고대 아르메니아어들이 여기저기 새겨져 있고 아그파트수도원보다 섬세하고 뛰어난 카츠카르khachkar가 여기저기 있는 것을 보면 khachkar 장인을 양성하던 학교였던 것 같기도 하다. 벽에 기댈 수 있는 돌 의자에 앉아서 카츠카르 조각을 배우던 강의실도 보인다.


사나힌의 아름다운 자연 조명
사나힌 수도원의 홀


khachkar


돌 십자가 카츠카르khachkar가 처음 나타난 것은 9세기였다고 한다. 어려웠던 나라를 위해 마음을 다해 돌 십자가를 예술품으로 탄생시켰던 그들의 피와 눈물과 염원은 어려웠던 시절 팔만대장경을 탄생시켰던 고려시대의 처지가 겹쳐진다.

가장 오래된 khachkar는 879년 '가르니'에서 제작되었으며 전성기는 12세기에서 14세기까지였다. 16세기에서 17세기에 다시 시작되었으며 오늘날까지 아르메니아의 수도원과 교회 등에 남아있는 40,000여 개의 khachkar는 전통이 이어져 예레반에서는 아직까지도 khachkar를 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khachkars



이전 20화 바투미를 온전히 즐기는 방법!​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