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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책

20240706/토/무더위

by 정썰
#허생

실띠의 술이 빠져 너덜너덜하고, 갖신의 뒷굽이 자빠졌으며, 쭈구러진 갓에 허름한 도포를 걸치고, 코에서 맑은 콧물이 흘렀다.

맑은 콧물이 주루루 흐른다. 가끔. 타고난 비염 때문일 거다. ‘맑은 콧물’하면 허생이 생각난다.

허생. 박지원(朴趾源)의 한문 소설 "허생전(許生傅)"의 주인공. 남산 기슭 흑적동(黑積洞)에서 글만 읽다가 품팔이로 생계를 이어오던 아내의 불평을 듣고 집을 나갔다. 서울갑부 변 씨(卞氏)에게서 돈 10000금(萬金)을 빌어다 장사하여 돈을 벌고 돌아와 변 씨의 빚을 갚은 뒤 두 사람 사이에 친분이 두터워졌다. 변 씨의 추천을 받아 마침 인재를 구하던 어영대장(御營大將) 이완(李浣)을 만나서 시사삼난(時事三難)을 들어 이완을 꾸짖고 자취를 감추었다.



면도를 하려고 세면대 앞에 섰는데 맑은 콧물이 또 흘렀다. 못난 콧수염 사이로 흐르는 콧물이 주책맞아 보인다.


세탁기가 고장 났다. 일 년 반 정도 더 버텨줘야 하는데 주책이다. 가전마트에 갔다. 비슷한 용량에 값싼 전시품이라도 있나 볼 요량으로.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1층에서 엘리베이터문이 열리자마자 낯익은 얼굴이 둘을 반긴다. 지난번 휴대폰 살 때 도와준 청년 닮았는데 살이 좀 쪄서 긴가민가. 혹시 실수할까 봐 반가워하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가 먼저 말을 건넸다. 그때 휴대폰 사 가셨죠? 맞다. 안녕하세요~ 살이 좀 찌셨네요. 몰라봤어요. 아내가 옆구리를 쿡 찌른다. 실수를 했다는 거다. 중년 남자가 청년에게 살쪘다는 말을 하는 게 결례라는 생각을 못했다. 친근함의 표현이자, 몰라봐서 미안함을 덮으려는 거였는데. 나이 들더니 주책이란다.



같은 말을 해도, 같은 행동이라도 나이가 먹으니 ‘주책’이라는 단어가 붙는다. 억울하지만 딱히 반박하기도 뭐 한 것이, 나이 탓은 아니지만 주책맞은 짓을 가끔씩 한 거 같아서다.

앞으로는 좀 더 언행에 주의를 기울여야겠다.


맑은 콧물을 핑계로 억지로 허생과 엮어봤다. 어디 보자 내가 장사해서 큰돈을 벌 상인가?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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