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111/월/맑음
단재로(Danjae-ro)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석교동 석교육거리와 미원면 구방리 구방삼거리를 잇는 충청북도의 도로. 도로 명칭인 단재는 독립운동가 신채호의 생가를 잇는 도로이기 때문에 신채호의 호인 단재(丹齋)에서 따온 것.
단재로를 가로질러 출근길을 달리다 육교에 가로 걸린 공연 현수막을 보았다. 자혜,.... 그다음은 흐릿하게 기억이 나지 않았다. 퇴근길에 봐야지. 집에 도착하고 나서 그냥 지나친 걸 알았다. 자혜는 누구고, 그 뒤에 붙은 문장은 무얼까? 오늘 아침 출근길에 유심히 봤다. 자혜, 그 누구도 아닌. 강렬한 제목이다. 그 누구도 아닌.
자혜는 이름이었다. 박자혜.
고령신 씨 대동보에는 신채호의 부인으로 등재되어 있으나 지난 2009년 국적회복 당시 유가족이 낸 가족관계 정리 인지소송에서 법률적인 혼인관계 증명이 어려워 가족관계 등록부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게 되었다 다만 두 아들인 상범과 수범의 어머니인 것은 인정이 된 상태. 연경대학에 다닐 때는 여학생 축구부까지 만들 정도로 활달했던 여성. 정도의 정보를 얻었다.
신채호 선생은 사방을 통틀어 머리 숙일 곳이 없다며 세수할 때에도 허리를 숙이지 않았다는 일화와 저서《조선상고사》,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등 시험공부로 얻은 한 뼘도 안 되는 지식으로 기억에 남았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신성우를 따라 족향(族鄕)인 충청북도 청주목 산내면(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옮겨 사셨고, 청년시절 북경에서 활동하실 때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의 중매로 유학 중이던 28세의 박자혜와 결혼. 이제야 출근길에 그녀를 만난 실마리를 찾았다. 무료 연극공연이라니 혜자롭다. 300명 한정이길래 서둘러 예약을 신청한다. 아내와 둘이 보면 좋을 거 같아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던 선생을 알아가는 출발점으로 삼아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