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201/토/흐림
빔 벤더스의 ‘퍼펙트 데이즈’
—포장된 허구의 세계
“허구는 현실보다 더 사실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존재할 이유가 없다.” 오에 겐자부로(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퍼펙트 데이즈’에 대한 찬사가 과하다. 한 편의 시처럼, 혹은 도시의 한 조각을 조용히 응시하는 명상록처럼 묘사했다는 것이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영화가 과연 현실을 반영하는지, 단순히 작가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인위적으로 정리된 카탈로그인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속 주인공 히라야마는 도쿄 시부야의 공중화장실 청소부로, 그의 일상은 정교하게 정렬된 의식과도 같다. 일정한 루틴을 지키며, 햇빛을 감상하고, 멋진 올드팝을 듣고, 숨겨진 문학을 탐독하는 그의 모습은 한 편의 잘 꾸며진 화보처럼 보인다.
도쿄에서 실제로 화장실 청소를 하는 노동자의 삶이 이토록 정제되고, 심지어 미적으로 보일 수 있을까? 빔 벤더스가 창조한 이 세계는 노동자의 세계라기보다, 철저히 자기 완결적인 감독의 이상향에 가깝다.
히라야마의 세계는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일상이 아니라, 지나치게 계산되고 기획된 ‘퍼포먼스’처럼 느껴졌다. 노동의 피로도, 불안, 사회적 구조 속에서 개인이 감당해야 할 현실적인 무게가 부재했기 때문이다. 일본 사회에서 노동자의 삶이란 단순한 루틴과 낭만적인 사색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일본 영화의 허위성과 싸웠다. 항상 “영화는 현실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인간의 본질을 드러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퍼펙트 데이즈’는 현실을 미화할 뿐 아니라, 노동자의 삶을 전시적 방식으로 소비한다. 과연 도쿄에서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는 50~60대 노동자가 이렇게 근사한 콧수염을 다듬고, 진귀한 테이프카세트에 담겨진 비싼 올드팝을 들으며,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삶을 유지할 수 있을까?
오에 겐자부로는 일본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특히 전후 일본이 겉으로는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그 이면에 감추어진 권력 구조를 비판했다. “일본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표면적으로는 아름다움을 유지하지만, 그 안에 흐르는 거대한 억압을 직시하지 않는 데 있다”고 말했다. ‘퍼펙트 데이즈’는 도쿄의 한 단면을 미적으로 포착하면서도, 그 안에 깃든 사회적 맥락을 배제하고 있다.
이 영화의 탄생 배경을 보면 더욱 명확하다. ‘퍼펙트 데이즈’는 일본 재단(The Nippon Foundation)의 ‘도쿄 화장실 프로젝트’에서 시작되었다. 일본 재단은 알려진 대로 A급 전범 용의자였던 사사카와 료이치가 설립한 비영리 기관으로, 겉으로는 모든 NGO단체에 지원금을 주는 공 기관으로 보이지만, 실은 우익 단체 지원과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과 같은 역사 수정주의 활동에도 오랫동안 뒷돈을 대온 조직이다. 이 프로젝트의 본질이 단순한 도시 환경 개선이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 일본의 이미지를 미화하는 일환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영화가 현실을 어떻게 ‘편집’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영화는 현실을 직접적으로 재현하는 다큐멘터리가 아니지만, 영화적 허구는 최소한 현실의 논리를 내포해야 한다. ‘퍼펙트 데이즈’가 유지하는 인물의 연기를 내면까지 담아낸다는 4:3의 화면비, 감각적으로 배치된 빛과 그림자, 반복되는 루틴의 미학은 분명 감독의 의도가 반영된 연출이다. 그러한 미장센이 영화의 본질적 진실을 가리기 위한 장치일 뿐이라면, 그것은 단순한 미학적 선택이 아니라 ‘현실 왜곡’이다.
“진정한 예술은 현실을 비춰주는 거울이 아니라, 현실이 감추려는 이면을 드러내야 한다.” 오시마 나기사의 말처럼, 영화는 가상이지만 가상 안에 현실을 관통하는 ‘진실’이 담겨 있어야 한다.
‘퍼펙트 데이즈’는 감각적으로 아름답다. 하지만 빔 벤더스는 아름다움을 재현하는 데 몰두한 나머지, 그 속에 있는 현실의 결을 거세해 버렸다. 이 영화가 다루는 세계는 실제 도쿄의 노동자가 아닌, 빔 벤더스 자신이 투영된 이상 세계일 뿐이다. 노동자의 삶을 그린다고 하지만, 정작 그 노동의 본질은 배제 됐다.
하루 7시간, 8시간씩 화장실을 청소하고, 이삿짐센터에서 주말에도 노동하고, 한두 달씩 기와지붕개량 공사장에서 매질당하고, 고층빌딩의 통유리를 닦기 위해 외줄 타기 하듯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는 도저히 이해 못 할 세상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도쿄의 화장실 청소부’가 아니다. ‘빔 벤더스가 꿈꾸는 청소부’다. 바로 그 점에서, 이 영화는 현실을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포장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좋은영화_하지만_슬픈영화 #퍼펙트데이즈 #만두야영화를보지말고읽어보랑게로
SNS에서 영화 퍼펙트데이즈에 대한 평을 접했다. 예술의 진정성, 현실과 진실, 영화적 허구 등의 틀에 영화를 밀어 넣어 아쉽다는 살짝 과대평가되었다는 느낌을 주는 글이다.
단편적인 영화만이 아니라 영화와 얽힌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통한 복합적이고 전문적인 평이다. 영화를 보지 말고 읽어 보라는 헤시태그도 인상적이다. 하지만 필자가 말하는 주인공의 비현실적 삶이 충분히 현실적일 수 있다는 생각이다. 내게 보여주지 않은 그의 과거 삶의 궤적에서 충분히 영화 속 삶을 설명할 이유가 있을 거 같다. 생각해 보니 굳이 개연성 있을 필요도 없지 않은가 싶다. 삶은 설명을 하는 것이지 설명이 되는 건 아닐 수도 있다. 현실이 감추려는 이면을 드러내야만 진정한 예술이라는 단정에도 거부감이 든다. ‘서울의 봄’과 ‘퍼펙트 데이즈’는 다른 측면에서 보고 싶다. 아무튼 히로야마의 어떤 하루가 부러웠고,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을 거 같다는 영화 같은 생각이 즐거웠다.
평가와 판단은 어려운 일이다. 그냥 느끼면서 살고 싶다.
집 근처에 수준당 분점이 문을 열었다. 단팥빵으로 유명하다. 단팥빵 두 개 사서 밤에 하나 먹었다. 빵이 어떻느니 팥이 달지 않아 좋다느니 단팥빵은 청주에서 최고라느니 하는 평가와 판단 대신 먹는 동안의 즐거운 느낌만 기억하는 걸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