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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꿈: 꼬마 3학년, 책을 읽다.

by 김원자 Jan 13. 2025

꼬마 3학년, 책을 읽다.

전남 함평군 나산면 월봉리. 전형적인 농촌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소위 '깡촌년'이었다. 6.25 전쟁 이후 아직 재건되지 않은 시골 초등학교는 단출하기 그지없었다. 교실은 시멘트로 마감되지 않은 흙바닥 위에 긴 나무 책상과 나무 의자만 있었고, 비가 오는 날이면 천장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기도 했다. 교실을 비추는 햇살 아래, 아이들은 여느 시골 아이들처럼 수줍고 단순하게 자랐다.

그러던 어느 날, 도시에서 한 여선생님이 전근을 오셨다. 심양례 선생님. 3학년 4반, 바로 우리 반의 새 담임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 처음 우리 반에서 하신 일 중 하나는 도서부를 만드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각자의 집에서 책 한 권씩 가져오라고 하셨고, 그렇게 모인 책들을 도서부에서 관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도서부를 책임질 도서반장으로 지목되었다.


여성해방의 단초를 열어준 핸릭입센의 '인형의 집' 장면여성해방의 단초를 열어준 핸릭입센의 '인형의 집' 장면

왜 나였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내가 책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록 깡촌에서 자랐지만 우리 집에서는 신문을 구독했고, 아버지는 농민잡지도 구독하셨다. 또 가끔 광주에 나가시면 책을 사 오셨는데 기억나는 것 중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 같은 책이 있었다. 제목으로 보건대 아버지는 '죄와 벌'은 오빠를 위해서, 그리고 '인형의 집'은 나를 위해서 사 오셨던 것 같다.  물론 그 당시에는 뜻도 모르고 읽었지만, 책장을 넘기며 활자와 그림 속에서 무언가 특별한 느낌을 받았던 기억은 선명하다. 그리고 '인형의 집'이 동화책이 아니라 결혼한 여성이 남편에게 인형처럼 대접받으며 살기 싫어 결국 집을 뛰쳐나오는 내용이어서 의아했다. 그 책은 어쩌면 여성해방의 단초를 열어준 매우 급진적인 책이었을 것이다. 어릴 때 읽은 그런 책이 나의 앞날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그땐 알 수가 없었다.  

책을 좋아하고 신문을 즐겨 읽던 나는 선생님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내가 도서반장이 되어 책을 관리하며 반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다시 모으는 일을 맡겼다. 도서부 활동을 하면서 나는 책의 세상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활자 속에서 만난 새로운 세계는 깡촌에서의 소소한 일상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 시절, 책은 내게 창문이자 나침반이었다. 시골 초등학교의 흙냄새 나는 교실에서 시작된 도서반장으로서의 경험은 내가 세상과 만나는 첫걸음이었다. 지금까지도 그 추억은 마음 한편에서 따뜻하게 자리 잡고 있다. 3학년의 작은 도서반장 시절은, 어쩌면 내가 세상을 더 넓게 보고자 했던 첫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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