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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은 Jan 31. 2021

분리수거를 하러 간 남편이 수상하다!

드디어 지켜진 결혼의 조건



일 년 전 이사를 하며 이 집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 중 하나는 재활용쓰레기를 매일 버릴 수 있다는 이었다. 특히 남편이 사실기뻐했다.


남편은 이사를 하자마자 하루도 빠짐없이 분리수거장을 찾아 재활용쓰레기를 버렸다. 박스며 음식물쓰레기, 종이, 플라스틱까지 줄인다고 줄여봐도 어쩜 쓰레기가 안 나오는 날이 하루도 없는지 남편의 몸은 쉬는 날이 없었다. 쓰레기의 양보다 더 놀라운 건 발생과 거의 동시에 분리수거장에 내다 버리는 남편의 처리속도였다. 그날 저녁 밥상에 올라왔던 양상추를 감싼 비닐, 소고기가 들어있던 플라스틱 용기, 저녁 먹은 후 발생한 음식물쓰레기까지 몇 시간 만에 집 밖으로 들려나갔다.


금요일에 같이 마신 맥주와 과자봉지도 밤 열두 시 새벽 한 시 할거 없이 갖다 버리는 것을 보고 그의 부지런함에 할 말을 잃었다. 지인에게 이 사실을 얘기를 하기 전까지 말이다! 그 친구는 내 말을 듣더니 깔깔 웃으며 자기 남편도 있는 쓰레기, 없는 쓰레기 다 모아서 나가려고 애를 쓴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영문을 몰라 말간 얼굴을 하고 있던 내게 아온 대답은 상상도 못 한 향이었다.


왜긴! 담배 피우려고 그러지! 지인은 또 깔깔 웃었다.

담배? 담배라고?? 이 모든 게?!!


담배였단 말이지. 그동안 '과자 먹고 싶다.' 하고 말하면 말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엉덩이를 들고 사 올까? 했던 이유가. 난 또 결혼 10년 차에도 변함없이 날 사랑해서인 줄 알고 뿌듯해하고 말았다. 세상 부지런한 모습을 자랑으로 여겼던 그 이면에 담배가 있었다니. 세상에! 나는 실소를 터트렸다. 남편이 아니라 나 때문이었다. 여우는 못돼도 토끼나 다람쥐 뭐 그 정도는 되는 줄 알았는데 나 완전히 곰이었네. 자기 전에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내가 곰이라니!!'










담배를 사이에 둔 남편과 나의 역사는 길고도 길었다. 

'나는 담배피는 남자랑 만나고 싶지 않아.'

담배를 끊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아빠는 엄청난 애연가셨다. 간접흡연과 담배냄새 같은 단어가 어린 시절과 섞여있던 탓에 결혼전제로 한 만남에 배우자의 금연은 요했다.  남편은 망설임 없이 금연을 약속했다. 그와 6년간 만나는 안 다 씹은 껌종이를 버리면서 '다 폈어'라고 하는 말실수를 하긴 했지만 그 시절에 예쁘다는 칭찬으로 '니 오늘 화장 잘 먹었네?' 밥 먹는 나를 보면서 '잘 먹네~'(이것도 칭찬이었단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던, 하여간 말주변이라곤 없던 남자여서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신혼 때도 의문에 빠진 사건 하나가 발생했다. 우리 집 우체통에서 말보로 한 갑이 발견된 것이다. 그것도 네 개 정도는 이미 피운 말보로! 당시 나는 누군가 집 호수를 착각해 우리 집 우체통에 그것을 넣었을거라 짐작했다. 일상적인 일이 아니라 별일이 다 있지 않냐며 점심시간에 회사 동료들에게 이 얘기를 전했다. 그 말을 들은 남자 직원들은 으며 당연히 말보로는 남편의 것이라 확신했다. '흥! 아니거든요?'



일찍 귀가해 아이를 돌봐도 모자랄 시간에 미드나 보퇴근을 미루는 이피디 의견 따위 관심 없고요, (어디서 타슬립을 했나 의심스럽게) 가부장적인 가치관으로 일할 때마다 부딪치며 서로의 배우자를 불쌍히 여기는 박피디의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과 말은 진작에 걸렀지만 미혼 기혼 할 거 없이 좋은 배우자로 꼽는 실장님마저 '남편 같은데'라는 말을 하자 갑자기 의심이 솟아났다.



그 말보로 혹시 자기 꺼야?

남편은 절대 아니라고 했다. 아니라던 단언보다도 담배를 펴도 말보로는 아니었을 거라는 말이 묘하게 설득력이 있어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남편믿었다.



그 이후에도 담배를 둘러싼 에피소드가 없진 않았으나 쌓여가는 결혼생활만큼이나 더해가는 사회생활에 나도 이런저런 일 겪어가며 담배만 필 줄 알았으면 '지금이 딱 그 타이밍이구나' 싶었던 억울한 순간, 극도의 스트레스의 상황도 맞이하게 되었다. 남편이라고 달랐을까. 그는 어느 술 취해 돌아온 밤에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며 담배 한 갑을 사 딱 한대만 피고 버렸다 고백했다.


내게 매운 떡볶이, 설탕을 쏟아부은 도넛이 있다면 남편에겐 그게 담배인가. 찌들어가는 사회생활에 약해진 마음을 귀신같이 알아챈 남편이 내 눈치를 보는 듯하더니 전자담배를 피울까 한다는 말을 건네 왔다. 별다른 취미도 없이 일하고 공동육아를 하는 남편이 목욕탕이나 가고 맥주 한두 캔 마시는 걸로는 삶의 버거움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 혼을 했다고 해서 서로의 희로애락을 다 알 수 있는 것은 아닌 데다 인생에는 분명 각자의 영역이 존재하니까. 나는 결국 대전제였던 결혼의 조건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남편을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그가 담배 피우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므로 그 날 이후 더 이상 굳이 그의 담배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피고 있을 줄은 알았지만 분리수거를 하러 나가는 그 길이 흡연의 길일 줄이야! 비밀스럽게 다녔던 남편의 분리수거 길을 생각하자 속은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재밌기도 했다. 10년이나 같이 살아놓고도 설마 나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이미지 관리를 했던 건가(영원히 안 벗겨질 애증의 콩깍지여!)



뭘 숨겼어! 말하고 가면 되지.


분리수거의 비밀을 들킨 남편은 별다른 말이 없었지만 그 이후로 좀 더 자유로워 보였다. 맥주를 마신 뒤 집 밖을 나설 때 '자기야 나 담배'하고 속삭이며 어김없이 다 마신 맥주캔을 들고 나섰다. 이때의 기분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 전의 모든 상황 들을 남편이 날 사랑해서 벌어진 일이라 착각했다면 이번엔 아주 비밀스러운 사실을 공유하는 끈끈한 동지가 된 느낌이었다. 물론 이것도 오래가지 않았지만.



며칠 뒤 남편은 꽤 오래 붙어 지냈던 전자담배와 이별을 고했다. 마침 담배가 망가진 김에 끊겠다 선언했을 때 나는 당연히 남편을 믿지 않았다.(흥, 자기 나는 더 이상 곰이 아니다! 응?!) 

하지만 이번엔 진짜다!! 현관, 베란다 할 거 없이 쌓여가는 분리수거 쓰레기가 그 사실을 충분히 설명해준다. 요즘 남편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은 '아, 내일 버릴까?'고 아침에 종종 들려오는 말은 '어제 버렸어야 됐는데!!'다.  남편은 여전히 부지런하지만 분리수거 영역에서 만큼은 담배의 역할이 컸던 모양이다.


그래, 그동안 분리수거장 문턱이 닳도록 너무 드나들었지!!


금단현상이 생각보다 심했는지 집안에 간식 싹 쓸어 출근하다 못해 어느 날은 30개월 둘째 녀석의 뽀로로 비타민 뭉치까지 들고나갔던 남편은 금연에 성공했다. 현관엔 뜯어놓은 택배 상자가 쌓여있고, 베란다엔 캔과 비닐들이 사이좋게 뒤섞여있지만 그래도 드디어 지켜진 결혼의 조건, 남편의 금연이 너무나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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