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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게 벌고 적게 쓰면서 오래오래

행복했지만 불안이 사라지진 않았다

by badac

언제까지 이런 시간을 갖겠다는 계획은 없었다. 사람들에게 신세를 지더라도 생활비를 줄이면서 가능한 만큼 휴식과 탐색을 이어가볼 생각이었다. 도서관에 가고 동네를 산책하며 며칠 지내다가 지루해져서 숙식이 제공되는 게스트하우스 청소 일을 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스스로를 일하면서 돌아다니는 장기 여행자 정도로 여겼다. 업무 시간 외에는 부산과 인근 지역 곳곳을 다녔다. 그러다가 해운대 바닷가에서 아침시간에 핸드드립 커피를 팔았다. 카페를 창업할 계획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었다. 여행 중에 커피를 마시려고 가지고 다니던 휴대용 기구를 이용하면 바닷가에서 커피를 내릴 수 있다. 카페가 열지 않은 이른 아침에도 산책하는 사람이나 여행자가 있으니 한두 잔 정도는 팔 수 있을 것 같았다. 팔리지 않아도 그 시간은 나를 위해 커피를 만들고 마시는 시간으로 충분했다. 그때 길에서 만난 재미있는 인연들이 나를 전주, 경주, 양주로 초대해주었다.


프리마켓 행사장이나 축제장에서 퍼포먼스 겸 커피를 내려 팔았다. 현재에 충실하면 그 시간들이 자연스럽게 다음 과정으로 이어져 운명처럼 해야할 일들이 나타났다. 계획이 없어도 불안하지 않은 신기한 경험이었다. 길거리 커피 장사는 한 달 했고 게스트하우스 일도 지겨워져서 그만 두고 초대해주는 곳으로 커피를 내리러 다녔다.

해운대 바닷가에서 자전거카페 <산책자의 모닝커피>를 열던 시절

부산에서는 ‘생각다방 산책극장’이라는 장소를 통해 많은 친구를 사귀었다. 재개발예정지의 주택을 싼값에 임대해 공연, 전시, 모임, 파티를 꾸리던 동화 같은 곳이다. 덕분에 1년 뒤에 부산에 다시 가서 한 달 동안 여행으로 쉬는 친구의 버거 가게에서 커피와 샌드위치, 팥빙수를 팔았다. 생활비를 벌 만큼 수익을 올릴 수 없을 게 뻔해서 지인의 빈 집에 살면서 신세를 졌다. 지역 이동이나 주거 조건을 따지지 않는 사람이 되니 재미있는 제안이 직접 들어오기도 하고 다양한 정보를 알려주는 사람이 많아졌다.


경북 상주의 명상·생태 공동체 ‘푸른누리’에서 석 달 동안 나물을 뜯으며 지낼 사람을 구한다고 했다. 나물에 대해서 잘 알게 되면 자급 능력치가 더 올라갈 것이다. 영영 회사원이 되지 않을 상황에 대비하여 자급자족의 기술을 배워두고 싶었다. 돈을 벌지 못하면 산에서 수렵 채집이라도 해야하니까. 당시의 내 최대 관심사는 생활비 절감이었다.


위빠싸나 명상은 처음 알게 된 2003년부터 지금까지 혼자서도 종종 하는 수행법이라 반가웠다. 게다가 숙식 제공에 월급까지 나온다. 기쁜 마음으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지만 아쉽게도 한 달밖에 지내지 못했다. 명상은 매 순간 벅차오르고 감동이었지만 산과 들로 나가서 일을 시작하니 나는 훌륭한 일꾼도 학생도 아니었다. 이 일에도 적성과 재능이 있을 텐데 나는 식용 나물을 구별하고 채취하는 능력 습득이 매우 느리거나 아주 없는 것만 같았다. 체력이라도 좋으면 다른 농사일이라도 할 텐데 평소에 몸을 쓰는 일을 하지 않던 터라 금세 탈이 났다. 쉬는 날이면 읍내 보건소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기를 여러 차례, 이러다 큰 병이 생길지도 모르니 그만 하는 게 좋겠다는 권유를 받았다. 실망이 컸지만 계속 무리를 할 순 없었다.

산나물을 잔뜩 채취하던 시절

산에서 내려온 뒤에는 천안 큰언니 집에 살았다. 언니는 서울의 가족들과 떨어져 혼자 지내면서 주말마다 서울 본가로 갔다. 그 시기에는 몸을 회복시키는 게 우선이어서 어디서 지내는지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혼자 지내느라 외로운 언니네 집에 머물면서 집안일을 조금 돕고, 근처의 한의원에 치료를 받으러 다녔다. 그러면서 다음에 갈 지역을 찾아보았다.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언니 집에서 지내는 건 주거비와 생활비가 크게 들지 않으니 경제적, 심리적으로 괜찮은 선택이었지만 계속 이렇게 지내고 싶지는 않았다.

한 달 상점 <칠월부엌>

대전의 게스트하우스 산호여인숙을 찾아갔다. 부산 친구들을 통해 알게 된 역시 동화 같은 장소였다. 일반 여행객들을 손님으로 맞는 게스트하우스이면서 만화가, 연극 배우, 화가,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부담 없이 지낼 수 있는 작가 레지던스이기도 했다. 전시, 공연, 주말장터, 운동회 같은 문화행사를 주최하는 것은 물론이다. 천안에 살면서 주말마다 대전으로 핸드드립 커피를 팔러 갔다. 여행자들에게도 팔고 산호여인숙을 드나드는 다양한 사람들에게도 팔았다. 그렇게 대전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고 몇 달 뒤 산호여인숙에서 살기 시작했다.

지금은 사라진 산호여인숙, 계단 아래서 커피를 팔았다.

매일매일 여행자와 대전 친구들에게 커피를 내려 팔았다. 매출을 더 높여보려고 후라이팬에 생두를 로스팅해서 원두도 팔고 주말 장터에도 나갔다. 수입이 많지는 않았지만 산호여인숙에서 월 5만원을 내면서 살았기 때문에 괜찮았다. 친구와 대형마트 의류판매 행사장에서 아르바이트도 해보고, 연극 연습 시간에 배우들의 자녀를 돌보는 일도 했다. 허술하지만 독립출판물도 만들어 판매하고, 커피 케이터링과 축하공연 등 내 삶의 모습 전부를 퍼포먼스 상품으로 내보이기도 했다.


산호여인숙을 운영하는 친구들은 ‘대동작은집’이라는 작가 레지던스를 한 곳 더 마련했는데 영광스럽게도 그 집의 첫 번째 입주자가 되어 살았다. 대전에서 3개월 정도 지냈다. 직장을 떠난 지 3년째다. 불안한 수입과 통장 잔액, 예측할 수 없는 미래가 두려워지는 순간이 자주 찾아왔다.

아무렇지도 않은듯, 적게 쓰고 오래 노는 여행의 기술을 말하고 다녔지만, 문득 두렵고 불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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