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비밀 -
서울의 부촌, 평창동의 한 저택. 별채 2층 창문 밖에서 보이는 화려한 샹들리에는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고 있다. 그 아래에는 빅토리아 시대의 공주들이 쓸 법한 아름답고 우아한 가구들이 쓰임새에 따라 배치돼 있다. 그리고 그 가구들 중 지금 이 순간 가장 효과적으로 쓰이고 있는 건 하얀 캐노피가 드리워진 이수아의 침대다.
최고급 침구로 꾸며진 침대 위에는 두 사람이 얽혀있었다. 부드러운 갈색의 짧은 머리카락과 그보다 더 밝은 갈색의 긴 머리카락이 베갯머리 주변에 몇 가닥 흩어져 있다. 그들은 각자의 머리카락과 이마를 서로 맞대고 체온을 나누었다. 가볍게 부딪히는 서로의 코끝에서 축축한 숨결이 오갔다.
“머리 좀 묶어. 니 머리카락이 눈을 찔러”
누워있던 갈색 머리의 남자가 눈을 찡그리며 소근거렸다. 그의 온화하고 잘생긴 얼굴에서는 그 찡그림조차 부드럽게 느껴졌다.
“눈을 감아”
남자의 얼굴에 키스를 퍼붓던 여자가 입술을 떼더니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럼 니 얼굴을 못 보잖아”
“안 보면 되잖아?”
“안 돼. 니 얼굴을 보는 게 좋단 말이야”
그녀가 굴복시킨 남자의 눈에도, 다른 그 누가 보기에도 여자의 얼굴은 감탄할 만큼 아름다웠다. 둥그렇게 솟은 이마, 쌍꺼풀진 커다란 두 눈과 휘어진 속눈썹, 천장의 샹들리에처럼 반짝이는 눈동자, 붉은 장미 꽃봉오리를 떠올리게 하는 입술, 화려한 이목구비에 어울리는 너무 진하지도 수수하지도 않은 화장까지. 그녀는 마치 살아 움직이는 구체관절인형처럼 보였다.
얇은 원피스 잠옷 위로 드러난 여자의 등과 몸의 곡선 역시 얼굴 못지않게 아름다웠다. 창문 밖에서 불어온 실바람이 그녀의 허리를 타고 올라 남자의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그 바람이 실어온 정원의 꽃향기는 그가 끌어안고 있는 여자의 체취보다 훨씬 소박했다. 그 결이 다른 향기를 맡은 남자의 동공이 갑자기 커졌다.
“잠깐만, 커튼을 안 쳤잖아!”
“아, 창문이 열려있었네. 뭐 어때?”
여자는 남자의 말에 전혀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누가 보면 어떡해?”
둘 사이가 들킬 것을 걱정하는 건 아마도 남자 쪽일까?
“보라고 해”
“하, 너 진짜 미쳤구나”
남자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여자의 입술에서 벗어났다. 그리고는 침대 밖으로 걸어 나가 창가로 다가갔다. 고개를 내밀어 바라 본 창문 밖에는 북한산 전경만이 멀찍이 펼쳐져 있었다. 남자는 정원에 사람이 없다는 것에 조금은 안심했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그는 창문 끝까지 커튼을 단단히 쳤다.
“우린 좀더 조심해야 돼, 누나”
“수호가 조심하면 되잖아?”
여자는 남자를 ‘너’라고, 2인칭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늘 다정하게 이수호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이수호는 여자의 목소리와 말투를 좋아했지만 갑자기 모든 상황이 피로하게 느껴졌다. 그는 침대에 털썩 주저앉으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수호는 손가락도 참 예뻐”
여자는 얼굴을 가린 남자의 길쭉한 손가락들에 하나하나 입을 맞추었다. 이수호가 얼굴에서 손을 털어내며 예민해진 목소리로 여자에게 물었다.
“갑자기 다가오면 어떡해? 누가 보면 어쩌려고?”
“그래서......싫어?”
여자가 새침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꼬맹아, 그만하고 싶은 거니? 이제 와서?”
여자는 대답 없이 바닥의 카펫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이수호를 잠시 바라보다가 예뻐 죽겠다는 듯 그의 머리를 왈칵 껴안았다.
“수호야, 내가 질린 거야?”
“왜 자꾸 물어봐? 그럴 리가 없잖아”
“알았어. 조심할게. 내 예쁜 수호”
여자는 이수호의 코앞에 자기의 아름다운 얼굴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여신처럼, 천사처럼 웃는다.
“예쁘니까 봐줄게”
이수호의 찡그린 미간이 천천히 풀어졌다. 그는 아버지의 네 번째 부인의 딸, 이수아의 아름다운 외모와 천진난만한 웃음을 아꼈다. 그녀를 볼 때마다 얼음이 녹듯 긴장이 풀리는 이 감정이 사랑인지, 욕망인지, 아니면 운명의 장난인지 아직은 몰라도.
“문은 잠궜지?”
“아, 잠그고 올게”
“진짜 못 말린다”
이수호가 반쯤 실없이 웃으며 한숨을 쉬자, 이수아는 벌떡 일어나 잠옷 자락을 나폴거리며 문가로 뛰어갔다. 이수호는 물끄러미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수아는 자신보다 세 살 더 많았지만, 지금까지 본 그 어떤 여자보다 싱그럽고 천진해보였다.
만약 딸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어린 고양이를 키운다면 이런 느낌일까? 이수호에게는 벼린 칼처럼 뾰족하게 살아가는 자신과 아이처럼 해맑은 이수아가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만큼 서로 다른 종으로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너의 이런 점이 좋은 걸지도 모르겠어’
이수호는 칼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가 이수아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점점 깊어질수록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수호의 법적 가족이니까.
금기를 어긴 관계는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가십거리 중 하나다. 이수아와의 관계가 드러나면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을 것이다. 그건 추호의 모자람도 허용하지 않은 이수호의 인생에 돌이킬 수 없는 오점으로 남을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수아를 놓을 수 있을까?’
늘 냉정한 이수호에게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지를 남기고 싶은 단 한 명이었다. 그리고 이런 감정이 든 순간, 완벽한 그의 인생에 아주 엷은 실금이 간 것을 그는 눈치 채지 못했다. 아무리 판단력이 뛰어난 사람도 자기 문제 앞에서는 종종 오판을 내리곤 하니까.
그러나 도자기에 생긴 실금은 조금씩 더 굵어지고 결국 도자기를 깨지게 만들 것이다. 그건 시간문제다. 이수호의 이성은 아직 인식하지 못했지만, 그의 감각은 불안의 씨앗을 감지한 것처럼 미세하게 그를 흔들고 있었다. 어쩌면 그건 방승철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음 일정에 대해 생각하다가, 차창에 달라붙은 여린 벚꽃잎에 무심코 시선이 간 이유일지도 몰랐다.
문을 잠그고 뛰어온 이수아가 이수호의 무릎에 폴짝 앉아 그의 목에 가느다란 팔을 둘렀다. 이수호는 이수아를 유리로 만들어진 공예품처럼 조심히 다루었고, 두 사람은 아무도 침입할 수 없는 둘만의 공간에서 그대로 서로에게 파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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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승철은 벽에 기댄 채 생각에 잠겨있었다. 그가 서 있는 곳은 평창동 저택을 소유했던 이들 중 한 남자가 어린 자식들을 위해 지었다는 조그만 독채의 지붕 밑이다. 나선형 계단을 몇 바퀴 오르면 지붕으로 이어지는 이 좁고 높다란 건물은 어린이용 서재로 쓰였다고 한다. 그 남자의 막내아들이 이 곳에서 책을 읽다가 원인 모를 화재로 죽기 전까지는.
이명렬 회장이 이 집을 사들인 후 서재는 창고로 용도가 바뀌었다. 그러므로 우아한 회장 댁 가족들이 이곳에 올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루치 일을 해내기 바쁜 고용인들의 손길도 이곳까지 닿지는 않았다. 게다가 어린 소년이 불타 죽었다는 음습한 건물은 누구에게나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장소였다. 그래서 이 외딴 독채는 방승철의 독차지가 되었다.
방승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듯 했지만, 이 창고의 지붕 밑에서는 별채의 모든 방이 훤히 보인다. 그건 별채 2층 이수아의 방도 마찬가지다. 조그만 가구들과 조그만 사람들을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면 그들의 모습은 눈앞에 있는 듯 정확히 보였다. 늘 로봇처럼 무심한 이수호의 비교적 활기 있는 표정도. 이수아의 한쪽 귓불에 귀걸이처럼 박힌 작은 점까지도.
이수호의 비서로서 수행하지 않을 때, 방승철은 대부분의 시간을 이 창고에서 보냈다. 이곳에서 많은 책을 읽고, 재계의 부자들이 고용한 먹물 먹은 놈들과 견줄 수 있는 지식을 쌓았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자신이 알아낸 것들 중 가장 가치 있는 정보는 바로 이 집 식구들의 비밀이라 여기고 있었다.
방승철은 탑처럼 높은 창고의 꼭대기에서 마치 신이 된 것처럼 저택을 내려다보았다. 고작 다섯 명뿐인 회장의 일가는 별채와 본채의 가장 넓은 방과 여러 용도에 맞춰 화려하게 꾸며진 공간들을 점유하고 있었다.
반면 고용인들에게 주어진 공간은 네 번째 사모님이 사용하는 화장실만한 크기다. 하나의 공간을 침실과 거실, 부엌과 식당 등 다용도로 써야했기 때문에 사방에 자질구레한 물건들이 점점 쌓여갔다. 그래서 이들의 공간은 더욱 좁고 너저분하게 보였다.
회장 일가가 차지한 영역과 고용인들에게 주어진 영역은 천국과 연옥의 차이만큼 불공평했지만, 이 저택에 사는 이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것이 신의 규칙일까?’
고심 끝에 그가 내린 답은 ‘그렇다’도, ‘그렇지 않다’도 아니었다.
'규칙은 없다'
신이 인간 세상에 관여하고 있다면, 이수호는 왜 부자 아버지를 가졌고 자신은 왜 지독히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을까? 이수호는 왜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고 자신은 왜 추한 절름발이로 태어났을까? 차라리 저 고용인들처럼 멍청하게 태어났다면 이렇게 괴롭지도 않았을 텐데.
방승철이 숨기고 있는 야심의 원천은 ‘질투’였다. 세상의 모든 육식동물들을 향한 질투. 그 중에서도 부와 젊음과 재능, 가장 아름다운 여자 ‘이수아’까지 모두 가진 이수호를 향한 강렬한 질투.
방승철은 이토록 불공평한 세상을 창조한 후 방임하는 신을 불신하면서도 신에게 열렬히 기도했다.
‘당신에게 규칙이 없다면, 내가 직접 만들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