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빛 그리고 꽃
잿빛 하늘
그런 날이 있습니다. 내 모습이 한없이 초라해 보입니다. 초라하다 못 해 부끄러워 숨고 싶기도 합니다. 이 쓸모없는 몸뚱이, 무거운 짐 밖에 안 되는 녀석 하며 중얼댑니다.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합니다. 나를 챙기다가 소중한 사람들을 놓칠까봐 무섭습니다. '이런 내가 사랑하는 게 말이 될까, 나 같은 녀석의 사랑이 무슨 사랑이겠어'. 무엇하나 충분치 않아보입니다.
꼭 그렇지만 않습니다. 구름이 층층이 쌓인 회색 하늘을 보다가 간혹 구름 사이로 비취는 눈부신 햇살을 우연히 마주한 적이 있지 않습니까. 구름이 해를 가린 것이었구나. 해가 없었다면, 빛이 없었다면 회색 구름조차 보지 못했겠구나. 감사해야겠지, 그래 감사해야 하는데, 왜 이리 마음이 어려운지 모르겠습니다.
변함없는 하루
나에게 지구가 하루를 반복하도록 해야 할 의무가 있었더라면 진작에 포기했을 겁니다. 하루를 반복해야 할 힘이 있었다면 조금 생각해 보겠지만, 왠지 불안합니다. 내가 나를 못 믿습니다. 반복은 그만두고서라도 그대로 유지할만한 지식이 없습니다. 지식이 있다면 할 수 있을까. 아닙니다. 의지가 없습니다. 내 삶도 바쁜데, 지구를 돌리고 태양을 순간순간 손 봐줘야 한다면 신경 쓰여서 어떻게 산답니까.
빛이 만약, 나처럼 의지가 있어서(역설적이게도) 빛으로 존재할 의지를 버렸다면, 빛이 더 이상 빛이 아니게 되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생각해봅니다. 조금이라도 그 밝기를 포기하고 구름 뒤에 숨는다면, 하루라도 자신을 포기했던 날은 종일 잿빛 하늘조차도 보지 못했을지 모릅니다. '변함없음'은 그래서 어렵습니다. 단순히 반복만 하지 않고 자신을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매일 포기하는데 난... 아 감사합니다.
꽃잎 한 장
겨울이 좀 긴 해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은 '동장군이 오는 봄을 시샘하느라 심술을 부린다'고 했습니다. 재밌는 표현입니다. 자신의 생각보다 더딘 자연의 변화를 인간의 변덕스러운 감정으로 표현했습니다. '조금 늦어도 결국 올 거야. 겨울 다음엔 봄이니까'라고 말입니다. 겨울 다음의 봄을 기억하는 사람마다 따뜻한 햇살을 마음에 품고 겨울이 가기를, 봄이 어서 오기를 포기치 않고 기다렸던 겁니다.
내일도 잿빛 하늘 일지 모릅니다. 계절과 달리 하루의 날씨는 변덕스럽기 때문입니다. 변덕스러운 날씨에도 변함없이 나를 포기하지 않기란 어렵고 그래서 두렵습니다. 어디서 바람이 부는지 꽃잎이 파르르 떨립니다. '고작 미풍이지 뭐' 무심히 지나치는데 미세한 향기가 바람을 타고 코 끝을 스쳐 지나가며 나를 막아섭니다 . 앗 그제서야 깨닫습니다. '피었잖아,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