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항상 사람이다

듣지도 보지도 않고 가로막다

by 쓴쓴

고민을 털어놓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SNS에 돌아다녔다. 대학교를 진로로 선택하지 않은, 이제 막 20세가 된 한 청년이 눈물을 보이며 두려움을 드러냈다. 그녀는 주위 사람들의 충고를 들을 때마다 자신이 초라해 보인다 했다.




누구나 겪는 선택에 관한 두려움이었다. 그리고 진행자는 '주위의 충고'에 집중했다. 사연을 털어놓은 이에게 인생의 가치를 폄하하는 무책임한 말은 흘려들으라고 격려했다. 계획이 없다는 이유로 무시당할 순 없다는 그의 말에 듣던 방청객도 공감했다. 나 또한 그녀가 용기를 내길 바라면서 같은 마음들을 확인할 생각에 댓글창을 열었다.


하지만 마주한 첫 댓글에 놀라다 못해 화가 났다. 사연의 주인공은 듣지 못할 테지만 한 인생이 또 무시당하는 느낌이 싫었다. 대충 내용은 이러했다. '뭐라도 해봐야죠. 그러질 않으니 할 줄 아는 게 없고 나약해지는 겁니다. 울지만 말고 실천해야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지 않겠어요?'




우리는 종종 타인이 어렵다. 압도하는 힘이 아닐지라도 나의 세계를 파악하기도 전에, 또 다른 세계를 꿈꾸기도 전에 나를 규정하는 불친절한 압력은 간혹 견디기 두렵다. 타인을 인내하기가 어렵다기보다 두려운 까닭은 헷갈려서다. 그 말이 진짜라면? 내가 나를 잘 모르는 걸까? 타인은 나를 아닌 이, 라는 말이 지금 이 순간 맞아떨어질까 봐 무섭다.


우리는 그래서 겨우, 나지막이 소용도 없는 저주만 되풀이한다. '나와 함께 울지 않는 모든 너'는 자랑하던 너의 세계와 같이 결국 무너질 거라고. 그런데 그 생각 때문에 도리어 내가 초라해진다. 타인이 규정한 세계에 이미 발을 들인 내가 보이기 때문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 소설 <데미안>의 한 구절이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싶은 적이 많았다. 알이 세계를 스스로 파괴할 기회를 빼앗긴 곳에선 껍질 그리고 반투명의 막 순서로 파괴된다. 그 반대가 아니라.


스스로 세계를 깨는 경험이 제거된 곳에서는 대체로 두 갈래로 운명이 나뉜다. 부화되기 전에 깨뜨려진 알에는 써니사이드업이나 완숙이라는 거창하고 익숙한 이름이 매겨진다. 만약 영양가 있는 달걀프라이가 되지 못했다면? 알은 새가 되어 자유롭게 날아가지 못하고 밑에 떨어진 빵부스러기를 쫀다.




자신을 압박하는 느낌을 받을 때 불안감을 제어해야 할 이유는 없다. 평정심을 잃었기에 나오는 울음을 막을 까닭도 없다. 그렇다 해도 한 인생이 압박감에, 눈칫밥을 먹고 우는 일이 온당해지진 않는다. 더욱이 그런 외압은 형편없는 결과를 만든다. 이 압박감의 영향력은 고작 서로의 세계를 부수는 일밖에는 미치지 못한다.


모두가 깨진 세계에선 누가 덜 깨졌느냐는 비교가 의미 없다. 누가 더 상대방의 알을 깰 수 있느냐는, 곧 힘과 가능성에 점수를 주는 세상에서는 말이다. 하지만 그 힘이 통제된다면, 다시 말해 각 개인이 자신의 세계를 언제 깨뜨릴지 더 나아가 깰지 말지 그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얄궂은 운명은 힘을 잃을 것이다.




우리는 더 나은 사람이 없고 더 못한 사람도 없다고 믿는다. 더욱 격한 말로 하자면 우리 중에 더 천하거나 더 귀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덜된 사람'처럼 보일까 봐 눈치를 주고받는 우리다. 간혹 못난 짓을 하는 경우는 모르겠지만, 상대의 처지를 다 안다는 듯이 쉽게 삶의 경중을 논하는 태도는 무슨 경우인지 생각해 봐야한다.


(그런 의미에서 노래 한 곡을 소개한다. Sara Bareilles의 King of Anything이다.)

https://youtu.be/eR7-AUmiNcA


할 줄 아는 게 없어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상상해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예를 들면 화가, 시인, 작곡가와 같은 예술가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에게 빚을 지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도 눈칫밥 먹지 않는 세상을 그려볼 순 없을까.




자신이 세상을 바라보는 의미, 가치, 신념만으로는 모든 존재를 담을 수 없다. 나만의 정의, 규정으로 보는 세상은 굉장히 협소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세상을 파악하는 행위는 멈추어선 안 된다. 비록 결함이 있다해도 정의를 내리는 행위는 예측 불가능한 세계를 합리의 장 안에 세우기 때문이다. 조금이나마 덜 낮은 확률로 세계의 단면을 파악하는, 모든 이해의 기초를 다지는 일이다.


중요한 점은 끊임없는 배움이다. 이미 만들어진 기초를 계속 사용하지 말고 갱신을 해줘야 한다. 물론 정교한 작업이라는 이유로 배제와 부정이 동반되는 작업이기도 하지만 외연을 확장시키거나 이전에는 몰랐던 세부사항을 첨가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후자의 방법은 전자의 가지치기보다 외면으로는 풍성하게 내면으로는 견고하게 정의된 그것에 정당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새롭게 정의하는 일은 자기반성과 맞닿아있다(여기서 반성이 반드시 죄와 연결된 말이 아니라 개정 혹은 개혁이라는 말로 바뀔 수 있다는 점을 기억했으면 한다). 그래서 시대를 해석하고 고치는 일이 너무 늦으면, 좀 더 나아가 자기부정을 시도하지 않는다면, 비록 천 년을 버텨온 신념이라도 사라진 기초와 함께 무너진다.


물론 그 즘이면, 무너진 잔해 사이에서 자신의 숨어있던 죄를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곧 상대의 눈을 가리고 자신의 눈을 가린 죄다.


너희는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너희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막았다. - 누가복음서 11:52 RNKSV